보릿고개를 넘는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에 정치 리스크가 덮쳤다.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에서는 자국 우선주의 기조에 부합하는 경영 전략으로 급선회하는 기업들의 움직임이 뚜렷하다. 반면 유럽연합(EU)은 중국산 전기차에 ‘관세 폭탄’을 부과하려다 내부에서 역풍을 맞고 중국과 물밑에서 정치 협상에 나섰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무빙 타깃’(움직이는 목표) 전략을 택하며 생산 거점을 다변화한 덕분에 국제정세 변화에도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22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미국 포드는 전날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한국 제조사와 협력해온 전기차 배터리와 관련해 미국 내 생산을 늘리고 양산 시기를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 포드는 내년 머스탱 마크-E 일부 모델에 탑재되는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생산 거점을 폴란드 공장에서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공장으로 옮기기로 했다. 완성차와 배터리 회사가 계약 이후 생산지를 옮기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포드는 SK온과의 합작사 미국 블루스컬SK 공장의 배터리 생산 계획도 앞당겼다.
업계에서는 포드가 미국 대선을 앞두고 자국 우선주의 흐름에 일조하겠다는 의지를 알리기 위한 행보라고 풀이한다. 미국 내 배터리 생산량을 늘리면 일자리 수가 늘어나고, 소비를 진작시켜 지역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된다는 계산이 깔렸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할 경우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친환경 자동차와 배터리 보급 전략 강화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 내 생산 확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지원 혜택을 노린 것이기도 하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도 포드의 이번 전략 선회로 IRA로 인한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혜택을 추가로 받게 됐다.
반면 EU에서는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 계획이 중국의 거센 반발에 후퇴하는 모양새다. 경제 이슈를 넘어 정치·외교 논란으로 비화했다. EU는 이미 수차례 추가 관세율 폭을 하향 조정했다. 업계에서는 중국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자동차 기업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중국산 전기차 관세율이 높아질수록 유럽 완성차 업체의 수익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국내 배터리 기업으로서는 글로벌 정세 변화가 단기적으로 경영 환경에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이미 미국이나 EU 곳곳에 현지 생산 시설을 골고루 구축하는 다변화 전략을 택한 터라 대응력은 충분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특정 국가 생산 시설에서의 배터리 생산량이 줄어 수익에 타격을 입을 수는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는 다른 국가에서의 생산량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상쇄하는 등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성필 윤준식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