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상자에 던져진 눈

입력 2024-08-23 01:08

눈은 고공(高空)의 공포로 휘청거렸다

말문이 막힌 채
상경하는 기차에서 몸을 던지듯
무작정 공단 앞에 뛰어내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뒤에서 떠미는 물량에 치여
상자에 내던져진다

아, 그런데 이 벼랑은
어느 날엔가 와본 듯해
누군가와 살아본 듯해

몸이 더 잘 얼 수 있도록
상자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재고가 쌓이는 겨울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닫힌 공장을 나서는 언니도
겨울옷을 입고 봄 속에서 녹아가겠지

겨울이 흘린 흔적을 찾느라
꽃밭의 눈들은 발갛게 부어가겠지

-박승민 시집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 중에서

저자는 눈(雪)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눈은 환생한 듯한 여공의 기억을 담고 있다. 눈은 상경하는 기차에서 몸을 던지듯 공단 앞에 뛰어내렸다. 어렴풋이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시인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본다. 그렇게 꽃밭의 눈들은 발갛게 부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