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했던 소설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옛 친구를 닮아가고, 미처 펼치지 못한 소설마저 말을 건네기도 어색한 짝사랑처럼 어려워진다면. 소설의 세계에서 그리움의 감정을 빚어낼 자신마저 없어질 때 “같이 가줄까”라며 말을 건네는 학창 시절 문학반 교사 같은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질서하게 쌓이는 것 같은 나만의 밑줄들은 생의 불꽃을 위한 성냥개비였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대목에서 내 청춘의 독서를 훔쳐본 건 아닐까 흠칫 놀란다. 젊은 날의 숲에서 마주했던 나뭇가지를 닮은 무수한 문장 사이로 흘러갔을, 문장 뒤로 지나쳤을, 그 아래 어디선가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을, 하지만 무심코 지나버려 무척이나 서운했을, 온갖 경이로운 감각의 요정이 저자가 펼쳐 놓은 무성한 덤불에서 이젠 무뎌져만 가는 나를 힘껏 노려본다.
일상에선 찾을 수 없는 행복, 소설에서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이 따로 있다는 걸. 그 행복이 그토록 찾던 나만의 파랑새라는 진실을 어렴풋이 느꼈어도 이토록 자상한 보따리로 풀어주니,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이토록 알아주니 내가 다 고맙다.
인간 감정의 뿌리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걸 신학의 영토에서 독일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밝혀냈다면, 문학의 영토에서는 저자가 밝혀내는 중이라고 얘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물음을 담은 느낌표가 마음 밭에 자꾸만 심어진다.
“소설을 읽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영적인 일인지”를 풀어내는 모든 페이지에 하나님의 바람에 휘청이던 작가의 한숨이 녹아 있다. 소설을 읽는 것이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여기 말고 다른 어디서 들어본 적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다채로이 인용되는 소설 영화 드라마의 대사 한 마디까지 자꾸만 “아하” 하는 눈길이 간다. “그렇지”라며 손길이 가 책갈피를 이리저리 뒤척이게 한다. 아! 하나님.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지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말마따나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제 예전처럼 소설을 급히 읽거나 몰아서 읽지 않을 것이지만 그 누구보다 소설을 오래도록 읽고 또 읽을 것만 같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천국의 시간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