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숭실대 문리대 조교수이자 교목으로 임용되면서 나는 비로소 ‘기독교 대학’의 본질이 새롭게 다가왔다. 기독교 대학처럼 미션스쿨(Mission School)은 건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정기적인 채플(대학 예배)을 실시하고 기독교 과목(기독교·성서개론, 기독교 사상사 등)을 교양 필수로 이수하도록 한다. 전교생이 전공과 관계없이 이를 필수로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
나는 ‘채플 자유화’나 기독교 과목을 타 교양으로 대체하는 요구는 기독교 대학의 사명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숭실대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에 반대해 폐교한 전통이 있다. 이런 정신에 따라 채플과 기독교 과목 교육을 철저히 지도해 전통을 유지하고자 했다.
숭실대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기독교 중산 계층이 다수 거주했고 기독교가 크게 번성했던 평양에 1897년 설립됐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1862~1931·한국명 배위량)는 부산의 초량교회와 대구 계명학원을 세운 뒤 평양 사저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오늘날 숭실대의 전신이다.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의 의료·학교 선교는 교회 개척과 함께 이들 사역의 주축이었고 이는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숭실전문으로 발돋움한 학교를 졸업한 동문 가운데는 한경직 강신명 방지일 목사와 박형룡 박윤선 박사 등 기독교를 선도하는 탁월한 지도자가 적잖다.
숭실대에서는 매주 수천 명에 달하는 전교생의 채플을 인도하고 교양 필수로 기독교 과목도 가르쳐야 했다. 이를 위해 여러 기독교 과목을 강의할 교수를 초청해야 할 책임도 내게 있었다. 여기에 매주 교직원 예배도 인도해야 했다. 교직원 예배는 학교의 정신을 되새기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새롭게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초창기에는 조찬 예배로 시작했으나 수요일 정오 예배로 옮겼고 점차 정착됐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채플을 운영하며 기독교 과목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 학교를 유지할 수 없다. 교수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강의와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학생과의 대면 봉사에 종사하는 교직원도 기독교 가치관이 반영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럴 때 학교 행정에서 기독교 가치관이 구현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가 문을 닫은 사건은 종교적인 조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학교 문까지 닫음으로써 숭실대의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다. 폐교 단행은 오늘날까지 숭실대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숭실대 교목실장을 지내면서 주일엔 영락교회에 출석했다. 이때 교회의 요청으로 교회 대학부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성경공부는 당시 여러 사회·신앙적 이슈를 신학적으로 해설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서울대 나학진 교수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을, 나는 4학년 학생을 담당했다. 이때 영락교회 대학부에서 활동했던 학생 가운데는 훗날 기독교 전공 교수가 된 후학이 여럿 나왔다. 최태연(백석대) 소기천(장로회신학대) 은퇴교수 등이다. 이들이 기독교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교수로 활약했음은 물론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