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다는 사실조차 세상에 알리지 못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그림자 아동’이 없도록 정부가 도입한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가 시행 한 달을 맞았다. 이 기간 가명으로 출산할 수 있는 보호출산을 결심했다가 아이가 태어난 뒤 마음을 바꿔 철회한 첫 사례가 등장했다. 또 지난 18일 기준 의료기관 368곳의 출생정보 1만8364건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자동 통보됐다. 이들 제도 시행으로 미등록 영유아 문제 대응에는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여전히 정부 보호망을 벗어나 있는 병원 밖 출산 문제까지는 해소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전한 출산, 양육 결심 이어지도록
19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올해 성인이 된 A씨는 임신 중반에서야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렸을 때 부모와 헤어져 홀로 살던 A씨는 가족이 없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남자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홀로 아이를 양육할 자신이 없던 A씨는 중절 수술을 결심했지만,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했고 시간만 흘렀다. 이미 뱃속 아기는 8개월이 된 상태였다. A씨는 낳아서 유기하거나 중절 수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웃이 미혼모 시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상담을 받게 됐다.
지난 6월 A씨는 임신 9개월을 넘겨 미혼모 보호시설에 입소하게 됐다. 당시에도 중절 수술에 대한 결심이 확고했다고 한다. 시설 관계자는 “수술을 하기엔 아기가 너무 컸고 위험하다”며 “곧 보호출산제가 시행되니까 아이를 안전하게 낳은 뒤 고민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아기를 낳기로 한 A씨는 익명 출산 방식인 보호출산제를 선택했으며 ‘1308’ 상담 전화를 통해 지역전담기관에 연계됐다. 이후 지역전담기관과 보호시설 관계자의 지원을 받으며 지난 7월 아기를 무사히 출산했다. 보호출산제를 택하게 되면 아기는 엄마와 최소 7일간 숙려기간을 가져야 한다. 양육을 쉽게 포기하도록 조장하는 대신 숙려기간을 통해 양육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라는 취지다. A씨는 “아기를 안아보고 싶다”고 했고, 직접 품에 안은 뒤 고민을 거듭했다. 3일간 고민한 끝에 A씨는 보호출산제를 철회하기로 했다. 보호출산제를 신청했다가 철회한 첫 사례였다.
A씨를 보호하고 있는 시설 관계자는 “보호출산제는 익명 출산을 원하는 산모 입장에서는 안심하고 출산할 수 있는 제도이지만, 아이에게 생모의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엄마의 정보를 남기고, 좀 더 키워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A씨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A씨는 최근 출생신고도 마쳤다. 자신의 이름 아래 아이의 이름이 등록됐다는 사실을 보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다만 A씨는 직접 양육할지, 입양기관에 보낼지를 두고 아직 고민하는 상태다.
지난달 19일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가 시행된 뒤 하루 평균 약 600건의 출생정보가 심평원에 자동 등록됐다. 제도 시행 이전에는 아이의 출생 사실이 지자체에 제대로 등록되지 않아 신생아 번호는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그림자 아동이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제도 시행에 따라 출생 후 1개월 내 신고 의무자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지자체는 7일 이내 출생신고를 하도록 독촉하고, 이후에도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직권으로 출생을 등록하게 된다.
같은 기간 위기임산부 상담 전화 1308을 통해서는 419건의 상담이 접수됐다. 출생통보제 시행으로 임신과 출산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임산부가 아이를 유기하거나 의료기관 밖에서 출산하지 않도록 보완하기 위해 동시에 시행된 제도다. 가명으로 산전 검진과 출산을 할 수 있고, 태어난 아이는 지자체장이 인도받아 보호하게 된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찾고자 해도, 엄마와 아이 둘 다 동의해야만 정보를 받을 수 있다. A씨가 철회하면서 15명의 위기임산부가 보호출산을 신청한 상태다.
임산부 B씨도 갓 태어난 아기를 키울 수 없어 유기를 고민하다가 1308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상담원이 즉시 현장에 출동해 아기와 산모를 보호할 수 있었고, B씨는 아기에 대한 출생신고를 직접 한 뒤 입양 절차를 진행 중이다.
‘병원 밖 출산’은 과제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 시행으로 위기임산부에 대한 지역 상담과 지원이 체계화됐지만, 여전히 병원 밖 출산 문제가 남아 있다. 상담 전화를 통해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방법을 안내받고 지원받을 수 있지만, 신원이 노출될까 두려운 위기임산부들이 아예 위험한 출산 방식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생통보제는 의료기관에서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자동 통보가 이뤄지기 때문에 병원 밖에서 낳은 아이는 제도권 내 보호를 받지 못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출생아의 99.8%가 의료기관에서 태어났지만 0.2%는 집이나 길거리 등 위험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의료기관 내 출산을 권유하고, 첫 도움의 손길인 상담 전화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지역상담기관 관계자는 “첫 전화를 끝으로 더 이상 상담 전화를 하지 않거나, 연락처를 남겨 다시 걸어도 거부하는 사례들도 있다”며 “근본적으로는 위기임산부가 양육을 결심할 수 있도록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일 복지부 1차관은 “제도 시행 전이었다면 놓칠 수 있던 소중한 생명을 ‘쌍둥이 제도(출생통보제·보호출산제)’로 살릴 수 있었다”며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어려움을 겪는 임산부를 적극적으로 돕고, 아이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