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광복절 ‘밀정’ 논란

입력 2024-08-20 00:39

‘용산에 일제 때 밀정의 그림자’ ‘대통령 보좌한다며 연극을 꾸민 밀정들’ ‘일본 우익과 내통한 반역자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불리는 이종찬 광복회장이 정부의 올해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하며 쏟아낸 비판은 야권에서도 놀랄, 격한 어휘로 채워졌다.

광복회장 아들이자 대통령 죽마고우인 이철우 연세대 교수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아예 대통령 역사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헌법상 표현 대신 ‘상해 임시정부’라고 말한 걸 지적하며 ‘이상한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대통령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의구심을 표했다. 순화했지만 부친이 말한 ‘밀정’ 문제의식의 연장이다.

대통령을 잘 아는 두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휘발성 최고 등급의 친일 이슈를 대통령을 상대로 공개 제기했다.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사태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계기는 뉴라이트로 의심받는 독립기념관장 인사였다. 김형석 신임 관장은 억울해한다. 앞서 자타 공인 뉴라이트 인사들이 역사·학술기관 수장 자리를 줄줄이 꿰찬 마당이다. 뉴라이트 활동 경력도 없는 자신이 왜 여론의 뭇매를 맞는가.

하지만 개인의 학자적 양심을 믿어준다고 해서 그를 독립기념관장 자리로 끌어올린 정치적 힘의 실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를 관장으로 선택한 힘은 이 교수가 말한 ‘이상한 역사의식을 부추기는’ 권력 핵심부와 떼어놓고 해석할 수 없다. 윤석열정부에서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대일·과거사 정책을 밀어붙인 그 힘이다.

이 힘의 존재가 드러난 건 지난해 3월, 일제 강제징용의 ‘제3자 변제안’을 통해서였다. 느닷없는 발표 후 방일한 윤 대통령은 도쿄 긴자거리에서 일본 근대화의 상징 음식을 1·2차 만찬 메뉴로 받아들고는 ‘선제적 양보’를 공식화했다. 이후 한국의 릴레이 양보가 쏟아졌다. 시민 안전부터 역사 해석, 안보 이슈까지. 전방위적 양보였다. 우리 정부가 나서서 1조5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를 사실상 측면 지원했고,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했던 사도광산 외교전에서 참패했으며, 5년 넘게 이어진 초계기 갈등은 일본 측 사과 없이 무마해줬다. 급기야 사람들은 독도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반일괴담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의심이 여기까지 깊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대통령의 공개 양보 후 정부 기관에서는 발맞춘 듯 이상한 실수들이 꼬리를 물었다.

지난해 나온 외교부 공식 자료에는 일본 정치인의 수십년 망언 자료가 통째로 삭제됐고, 국방부는 교육자료에 독도를 ‘영토분쟁 중’이라고 기술했다가 전량 회수하는 소동을 벌였다. 행정안전부는 ‘3·1운동이 하얼빈 임시정부에서 시작됐다’는 상식 밖 홍보물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정권에 레이더를 곤두세운 KBS에서는 광복절에 기미가요가 흘러나왔고, 여권 단체장 관할의 서울 지하철역에서는 독도 조형물이 철거됐다. 과연 이 모든 ‘실수들’이 최상층부의 ‘이상한 역사의식’과 무관할까.

광복회장이 ‘밀정’ 운운한 건 비유일테지만 그래도 누구를 염두에 둔 말인지 궁금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최근 인터뷰를 읽으며 밀정은 모르겠으되 ‘이상한 역사의식’을 가진 이들이 공유한 정서와 지향은 확인했다. 일본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한국의 부단한 노력. 듣고보니 한·일 사이 ‘반잔의 물컵’을 누가 채워야 하는지 명확해졌다. 일본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일본이 경외심을 품을 때까지 한국인이 넘치도록 채워야 하는 거였다. 대통령실 말대로 우리 청년들이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