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희귀병 환자 위한 치료약 사전승인제, 되레 골든타임 ‘발목’

입력 2024-08-20 03:20
비정형 용혈성 요독증후군(aHUS)의 원인인 적혈구 깨짐 현상. 어도비 스톡

적혈구 깨지면서 혈전이 콩팥 등 혈관 막아
약값 1년에 3억… 건보 없이는 치료 불가능
한달 안에 사망 많은데 승인율 18% 불과
기준 엄격해 악화되길 기다리는 경우까지
응급심의도 2주 걸려… 심의 기간 단축돼야

국내에는 값비싼 희귀질환 치료약의 접근성 보장을 위해 ‘사전승인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치료제 투약 전, 환자 상태가 건강보험 급여 지원으로 치료받기 적합한지 심의하는 제도다. 희귀질환자들은 경제적 부담을 덜어 빠르게 치료제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정부로선 부적절한 지출로 인한 건보 재정을 보호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 첫 도입 후 현재 8개 치료제가 적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일부 희귀질환 치료제는 이 제도가 되레 환자 치료의 발목을 잡고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해당 질환은 ‘비정형 용혈성 요독증후군(aHUS)’이다. 인구 100만명당 2~3명 걸리는 극희귀질환이다. 몸의 면역을 유지하는 ‘보체’라는 물질이 유전적 결함에 의해 과활성화돼 발병한다. 이렇게 되면 바이러스뿐 아니라 정상 적혈구까지 공격해 적혈구가 깨지는 ‘용혈’ 현상이 일어난다. 용혈 때문에 생긴 혈전(피떡)이 콩팥 심장 폐 등 주요 장기의 혈관을 막아 기능을 떨어뜨리는 ‘혈전미세혈관병증(TMA)’을 유발, 생명에 위협을 준다. 특히 미세혈관이 많은 콩팥이 큰 영향을 받는다. 제때 치료하지 않을 경우 수일 내로 콩팥이 망가져 투석을 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성인 aHUS 환자 절반 가까이(46%)가 첫 TMA 발생 후 한 달 안에 말기 콩팥병으로 악화하거나 목숨을 잃는다고 보고돼 있다.

용혈로 생긴 혈전이 콩팥의 미세혈관을 막아 신기능 저하로 투석을 받는 장면. 어도비 스톡

김명규 고려대안암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19일 “빠르게 증상이 진행되고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예후가 매우 나쁘기 때문에 피로나 쇠약감 등 의심 증상이 있을 시 신속하게 전문의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aHUS의 유일한 치료제(솔리리스)가 2016년 국내 허가를 받아 나와 있다. 용혈을 일으키는 보체의 과활성화를 억제해 혈전 합병증과 사망 위험을 낮춰준다. 임상연구에 의하면 이 약을 사용한 88% 환자에서 치료 2년간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았다. 조기에 치료를 시행할수록 콩팥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료제 투여 외에 혈장 수혈 등 보조 요법도 고려될 수 있으나 콩팥 기능 악화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문제는 환자들에게 ‘동아줄’ 같은 이 치료제가 2018년 7월 건보 급여 사전승인 대상에 포함되면서 진료 현장과 동떨어진 급여 기준, 낮은 승인율, 느린 승인 속도 등으로 인해 환자들이 오히려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이 약의 최초 급여 기준 설정 당시에는 aHUS 진단 기준이 다소 까다로웠기에 급여 기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됐다. 하지만 환자 경험이 쌓이면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진단 가능해지고 국제 진단 기준도 보다 완화된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국내 급여 기준(9가지 제외 기준 및 4가지 대조건 모두 충족)은 여전히 엄격해서 이를 충족하기 위해 환자 증상이 나빠지길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다변화된 진단 가이드라인에 맞게 승인 기준 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aHUS에 대한 해당 치료제의 사전승인율은 지난 6월 기준 18%로 다른 희귀질환 치료제의 승인율(평균 60%) 대비 매우 낮은 상황이다. 지난해에는 47건의 사전심의 신청 중 단 3건만 승인됐다. 올해 역시 15건의 신청 중 12건이 불승인됐고 이로 인해 2명이 사망, 4명은 콩팥 투석으로 이어졌다.

단기간에 증상이 악화되는 응급 질환이라 치료제를 비급여라도 투약하고 싶어도 연간 3억원 넘는 비용(성인 기준)을 온전히 부담해야 해 사실상 건보 적용을 받지 않고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의료계 관계자는 “aHUS는 유전적 결함에 의해 선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20%이고 수술이나 감염, 약물 복용 등 외부 요인 영향을 받아 이차성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80%이다. 그런데 이 80% 유형에 대해 전문 의료진과 심평원 간 해석에 간극이 존재해 많은 부분 불승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치료제의 낮은 사전승인율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서면 질의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대부분 급여 기준에 대한 의료진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일축해 환자와 진료 현장의 반발을 샀다.

이 질환 진료 의사들은 낮은 승인율 외에 심의 기간과 불승인 사유 안내 부분도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급성 희귀질환임을 고려해 ‘응급 심의제’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2주가 걸리고 있어 운 좋게 투약이 승인돼도 콩팥이 거의 망가진 뒤에나 치료제를 접하기 십상이다. 불승인에 따른 이의 신청은 정기 심의를 통해 이뤄지는데, 이는 한 달 가까이 걸린다.

당장 치료제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2주의 심의 기간도 적절한 치료를 어렵게 하는 만큼, 단축이 필요하다는 게 의료진 입장이다. 또 급성기·응급 상황인 경우 첫 투약은 의료진 판단에 맡기고, 안정화된 후 유지 요법에 대해선 추후 심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전승인 대상 8개 질환 중 응급성 질환은 aHUS뿐이다. 아울러 필요할 경우 심의에 주치의가 참석해 환자 상태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김 교수는 “aHUS는 감별 진단이 매우 중요하며 최근 유전자 검사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환자 증상이나 일부 검사결과만을 갖고도 aHUS 환자로 강하게 의심되는 경우 나쁜 예후를 고려해 빠르게 사전심의를 신청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대부분 기준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승인되고 그 과정에 콩팥이 망가지거나 생명을 잃는 환자들을 마주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치료 시기를 놓쳐 환자가 생명을 잃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