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이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에 투자해 얻은 이익보다 엔화를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해 번 수익이 더 많을 것이다.”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존 오서스가 최근 미국의 한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다. 지난 5일 발생한 글로벌 증시 폭락 이후 시장 전문가들은 ‘8·5 쇼크’의 가장 큰 원인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를 언급한다.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최대 4조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시장의 변동성이 커졌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가 얼마나 청산됐는지를 두고선 의견이 분분하다. 엔 캐리 투자의 상당 부분이 청산됐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여전히 엔화가 저평가돼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서는 엔화 강세가 완화되면서 최근 엔 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 번째 ‘엔 캐리 붐’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미국 달러나 멕시코 페소 등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이 투자 방식은 최근까지 일본과 미국 간의 큰 금리 차로 활발히 이뤄져 왔다. 미국은 지난해 7월까지 빠르게 금리를 인상해 현재 5.25~5.50%에 이르렀지만 일본은 지난 3월까지 8년 동안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 붐은 역사적으로 1998년과 2007년, 코로나19 시기까지 총 3번 있었다. 첫 번째 정점은 1998년 일본 내 경제 불안이 고조되면서 일본은행이 시장에서 해외 자금을 조달할 때 일반적인 시장 이자율보다 높은 이자율을 부담해야 했던 ‘재팬 프리미엄’이 있었을 당시다. 해외 투자자 입장에선 저렴한 비용으로 엔화를 빌릴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를 비롯해 많은 금융기관이 앞다퉈 엔 캐리 트레이드에 뛰어들었다. 2차 붐은 ‘리먼 쇼크’ 이전인 2007년 전후에 발생했다. 미국은 2006년까지 17회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하며 정책금리를 2년 동안 4% 이상 인상했지만 일본은 금리를 동결했다.
이후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에 다시 활기가 돋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겹치면서 엔 캐리 투자 규모는 더 커졌다. 공급망의 혼란이 발생하자 식량과 에너지의 가격이 급등했고 미국이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기준금리를 급격히 인상한 것이다. 일본은 이때도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했다.
투자자, 서둘러 엔 캐리 청산
이번 엔 캐리 트레이드의 급격한 청산은 일본 통화정책의 방향이 급격히 전환되면서 발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9월 금리 인하 기대감이 커진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지난달 31일 마이너스 금리에서 전환한 지 4개월 만에 금리를 추가로 올린 것이다. 미·일간 금리 차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 투자자들은 서둘러 청산하기 시작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18일 “해외 투자자 입장에서 엔화가 달러당 160엔까지 올라갔을 때는 저금리에 엔화를 빌려 달러에 투자했지만 갑자기 140엔대로 떨어지면서 빨리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심리가 퍼졌다”고 설명했다.
현재 엔 캐리 트레이드의 규모와 관련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다. 경제학자들은 그 규모를 1.1조(1496조9900억원)~4조 달러(5443조6000억원)로 추산한다. 다만 일본은행이 집계하는 외국은행 재일(在日) 지점의 본점과의 거래로 간접적으로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해외 투자자들이 엔 캐리 트레이드를 시행할 때 외국은행에서 자금을 빌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에 따르면 이 자산은 지난 3월 기준 13조5000억엔을 넘어 2022년 1월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청산 거의 끝나” VS “청산 여전”
8·5 쇼크 이후 현재까지 엔 캐리 트레이드가 얼마나 청산됐는지를 두고선 전문가들 의견이 엇갈린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발표하는 비상업 부문의 엔 매도 포지션은 지난달 2일 기준 18만4223계약(약 2만2400억엔·20조 5540억원)으로 2007년 6월 이후 최대 규모로 불어났으나 6일 기준 1만1354계약으로 한 달 만에 90% 이상 감소했다. 이 지표 역시 엔 캐리 트레이드의 동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JP모건과 골드만삭스는 이 지표를 근거로 엔 캐리 투자의 상당 부분이 청산됐다고 판단한다.
국내 증권사도 엔 캐리 청산 공포가 진정됐다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대신증권 이경민 연구원은 “14만여 계약이었던 투기적 순매도 포지션이 5주 만에 1만 계약으로 축소됐다”며 “엔 캐리 청산에 대한 공포와 유동성 측면에서의 영향력은 정점을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반면 캐나다 TD증권의 글로벌 전략 책임자인 리처드 켈리는 지난 13일 미국 CNBC방송에 “캐리 트레이드의 해체가 끝났다고 보기에는 이르다”며 “엔화가 여전히 저평가돼 있으며 앞으로 1~2년 동안 강세로 변동될 것이고 이는 시장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각에선 엔 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1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홀딩스는 다양한 투자자가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엔화를 다시 빌리기 시작했고 밝혔다. CFTC가 같은 날 발표한 엔화 보유량 동향을 보면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은 지난 13일 기준 엔화를 2만3104계약(약 2800억엔·2조6000억원) 순매수했다. 순매수세로의 전환은 2021년 3월 9일 이후 약 3년 5개월 만이라고 한다.
하 교수는 “일본은행에서 최근 금융시장이 불안하면 추가로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향후 일본 측에서 나오는 충격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관건은 미국의 통화정책 방향”이라고 짚었다.
장은현 기자 e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