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한 (13) 해외 선교 시작한 충현교회… 통역과 안내로 봉사 사역

입력 2024-08-19 03:02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벨기에 루뱅대 내 후설 자료 보관소의 중세 교부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독일로 유학 온 이래로 아무 연락이 없던 충현교회에서 1975년 기별이 왔다. 김창인 목사가 덴마크 스웨덴 지역 교회를 방문해 설교하니 설교 통역과 선교 여행 안내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한편으로 기뻤다. 충현교회가 해외로 눈을 떠 세계 선교를 시작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다른 편으로는 생소한 장소와 장거리 이동이 부담됐다. 내가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덴마크 코펜하겐역까지 마중 나가는 건 부산에서 만주 지역까지 올라가는 셈이다. 그렇지만 출신 교회 담임목사가 요청한 것이라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그해 7월 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코펜하겐까지 기차로 이동해 김창인 목사를 마중했다. 한 달 가까이 그의 설교 통역자로 활동하며 함께했다. 실제 이를 계기로 충현교회는 해외 선교에 눈을 떴다. 이듬해 1976년 교회는 육호기 목사를 독일 선교사로 파송했다. 김창인 목사는 유럽 현지에서 오순절 계열인 하나님의성회가 국제적 관계망이 튼튼한 걸 보고 이 교단을 인정했다.

유럽 상황은 장로교가 절대다수인 한국교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하이델베르크대에 유학 중이던 1970년대 초반에 최자실 목사가 독일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회에 초청받아 방문한 일이 있다. 나 역시 이 부흥회에 참석해 그분이 여성 부흥목사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지켜봤다. 당시 최 목사는 순복음 신학에 입각한 설교를 했고 깨끗한 처신을 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충현교회가 선교사 파송을 위해 연락한 북유럽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성회 소속이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지역 교회는 대부분이 루터교회다. 당시 한국 장로교는 루터교와 전혀 행정적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 하나님의성회는 국제적인 연락망이 있어 한국 장로교 선교부와도 연결돼 있었다. 충현교회는 이들과 협업해 해외 선교에 나선 것이다. 김창인 목사는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주관자”라는 종교개혁적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독일어로 번역된 뒤 다시 덴마크어나 스웨덴어로 2중 통역됐다. 그의 영성 있는 사도적 복음은 이 지역 성도에게 감동을 줬다.

김창인 목사가 귀국한 지 1년 후 충현교회 지원을 받은 육호기 선교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유럽 선교사로 파송됐다. 당시 예장합동 선교부는 독일 교회와 아무런 협력관계가 없었다. 그야말로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투입되듯 온 것이다. 그를 맞이하는 독일 교회 파트너도 전혀 없었다. 나는 아주 난감했다. 예전보다 약세라고는 하나 독일 교회는 한국인 선교사를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육 선교사는 독일인 선교보다는 한인 유학생과 간호사, 광부를 대상으로 활동하고자 했다. 나는 5년간 친분을 쌓아온 독일 지인들과 교섭해 일단 그가 비스바덴 지역 독일 교회에서 한인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도록 조치했다.

육 선교사가 독일에서 자리 잡은 1977년 여름, 나는 6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독일 정부는 철학박사 논문 통과까지 독일에서의 모든 생활비를 지원했다. 귀국 시기가 다가오자 감사하게도 귀국 여비와 논문 출판 비용까지 지원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이 나에게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항상 좋은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