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한 (14) 6년 유학 마치고 귀국… 32세 나이로 숭실대 교목 실장에

입력 2024-08-20 03:06
김영한(왼쪽) 기독교학술원장이 충현교회 대학부에서 만난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과 함께 197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찍은 사진. 유학을 마치고 숭실대 교목에 부임한 김 원장은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회와도 인연을 맺는다.

6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어디서 일할 것인가를 두고 기도했다. 김창인 충현교회 목사와 교우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다음에는 서울대기독교동문회(서기동)를 찾았다. 초교파 기독인 모임인 서기동은 1959년 세워진 기독인 동문회다. 법대 출신인 박인각(광림교회 장로·전 국회의원), 문리대 출신 장하구(향린교회 장로·종로서적센터 대표), 어윤배(새문안교회 장로·전 숭실대 총장) 등이 초창기에 활동한 인사였다. 해마다 신앙지 ‘서광(曙光)’을 내며 성탄절 축하예배, 야외예배를 함께 드린다. 작지만 오래 지속해서 결속된 모임이다. 나는 여기서 김영재 김명혁(합동신학대학원대) 이형기(장로회신학대) 손봉호(고신대) 교수,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등과 교제했다.

이 가운데 특히 당시 숭실대 교수인 고범서 조요한 어윤배 등이 교회 친화적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영향력이 큰 총장급 교수였다. 내가 대학 재학 당시 서울대는 서울 동숭동에 학교가 있었기에 숭실대가 기독교학교인 줄은 알았지만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이런 내게 교수인 이들 선배가 숭실대 교목으로 일하라고 추천해줬다. 숭실대는 이전에 교목을 맡았던 이가 안식년으로 간 뒤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아 교목 자리가 빈 상태였다.

이때 숭실대 이사장은 일신방직 회장인 김형남 박사였다. 김형남 이사장은 면접 자리에서 온유하게 “교목 일을 충실히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숭실대는 김형남 김창호 김영호 등 일신방직 일가와 인연이 있었다.

학교 채플 인도와 기독교 교과목 강의는 교목실장이 하는 중대한 직무였다. 숭실대는 신앙 열정이 있는 젊은 학자이자 목사를 구하고 있었다. 이때 나를 조요한 어윤배 교수가 추천한 것이었다. 귀국 후 나는 총신대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등 현대 신학자를 강의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당시 이종성 학장의 요청으로 장신대에서 졸업생 필수 과목인 현대신학도 가르쳤다. 1970년대 후반만 해도 해외 박사 취득자가 흔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내가 맡은 ‘현대신학 강의’는 두 학교 신학생의 환호를 받았다.

총신대와 장신대에서 강의했으나 어느 학교에서 일해야 할지는 정해진 바가 없던 상황이었다. 종합대학은 신학대학보다 더 넓은 시각으로 철학과 신학을 학문적으로 살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신학대가 아닌 기독교대학인 숭실대를 택한 이유다. 특히 숭실대는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평양 사랑당 서재에서 시작한 선교 학교로 일제의 폐교 위협에도 신사참배에 반대한 민족대학이다. 이런 학교의 정신에도 감동했다. 이 선교 학교의 기독교 정신을 잘 계승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32세의 나이로 숭실대 교목실장에 임용돼 1978년 2월부터 교목실로 출근했다. 당시 고범서 숭실대 총장은 미국 명문 밴더빌트대 신학대에서 기독교윤리학을 연구한 분이었다. 숭실대 임용은 학자와 교수로서 살고자 했던 내 인생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숭실대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측 학교였다. 숭실대 교목이 되는 건 내 소속이 기존에 신앙생활을 해왔던 예장합동에서 예장통합 측으로 옮겨지는 걸 의미했다. 출석 교회도 예장통합 교단 소속 교회로 옮겼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