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한 (12) 하이델베르크대 철학부 이어 신학부까지 박사 학위

입력 2024-08-16 03:05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오른쪽)은 독일 유학 당시 방학 때마다 신학부 지도교수인 알브레히트 페터스의 자택에 자주 초대받았다. 김 원장은 이들 부부와 학문적 담론을 나누곤 했다.

철학과 지도교수인 디터 헨리히 교수는 칸트와 헤겔 전문가이지만 나는 본래 의도대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하고자 했다. 헨리히 교수는 학생의 학문적 의도를 존중했다. 학문적 관용성 의미에서도 그는 큰 학자다.

그는 독일의 신칸트주의자 파울 나토르프의 책을 내게 주면서 이를 연구할 것을 권했다. 나토르프는 마르부르크대 철학부 교수로 신칸트주의를 표방하다 말년엔 인식론적 초절주의(超絶主義)로 나간 사상가다. 나는 ‘후설 현상학과 나토르프 신칸트주의 인식방법’을 연구했다. 연구 초점은 ‘추론적 반성’인가 ‘선험적(先驗的) 직관’인가 하는 문제였다. 후설의 직관에 의존한 인식 정초(定礎)도 궁극적으로 추론적 반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주장했다. 후설이 주장하는 선험적 순수 직관이란 매개된 것으로 절대 인식이란 불가능하다. 신칸트주의가 말하는 인식이란 끊임없는 자기 추론으로 되돌아가는 인식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이 박사 논문은 1974년 11월 통과됐다. 이후로는 신학을 주전공으로 등록하고 종교개혁 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내가 신학 분야에서 관심이 있던 건 ‘조직신학 방법론’이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적 사유의 핵심은 말씀에 입각한 계시적 사유이자 신앙을 우위로 한 사유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 한국에선 루터를 종교개혁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루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종교개혁 신학을 새롭게 정립한 대신학자’였다. ‘루터 없는 칼뱅의 기독교 사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부 지도교수인 알브레히트 페터스에게 자주 칼뱅을 말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칼뱅은 루터의 제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1483년생인 루터는 1509년생인 칼뱅과 26년의 나이 차가 있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루터의 사상을 조직적으로 정리한 것임을 독일에서 실감했다. 이들의 종교개혁적 사유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와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 등에게서 ‘계시 의존적 사유’로 표현됐다.

나는 신학 박사 논문에서 “현상학적 사유는 선험적 사유로서 ‘유아론적 이성’ 일변도의 사유”라고 규정했다. 현상학적 환원(現象學的 還元)이란 대상 지향적 사유에서 대상 사유적 자아로 되돌아옴이며 이는 자아 중심적 사유다. 성경은 자아(Ego)를 버리라고 말한다. 십자가 사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못박는 것이다. 나는 이를 신학적으로 적용해 현상학적 환원을 ‘신학적 환원’(theologiche Reduktion)으로 변형했다. 신학적 환원은 자아 중심적 사유에서 말씀 중심적 사유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1977년 귀국 전까지 연구를 거듭해 신학박사 논문을 작성했다. 숭실대에서 6년간 강의한 후 안식년을 얻은 나는 다시 하이델베르크대로 가 이 논문을 제출했다. 1년간 논문을 계속 수정해 83년 12월에야 신학박사 논문이 통과됐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2월 구약학과 신약학, 교회사와 실천신학 네 분야의 구두시험을 거친 후 신학박사 학위증을 받았다. 하이델베르크대 철학부에서 1974년 철학박사(Dr.phil.)를, 같은 대학 신학부에서 10년 만에 신학박사(Dr.theol.)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 은혜였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