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극도로 가난하게 된 원인은 노동에 대한 오랜 혐오 때문이다. 육체노동을 경멸하는 한국인의 노동관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공업선교사로 활약한 조지 그레그(1863~1939·한국명 구례구) 선교사가 1914년 후원자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기계공작과 제도(製圖) 기술 전문가인 그레그 선교사는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산업학관에서 조선인에게 철공과 목공 기술을 전수했다. 그가 21년간 이곳에 머물며 배출한 제자는 3000여명에 달한다. 공작 기계인 선반(旋盤)과 밀링 등을 국내에 도입한 공업 분야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편지에 남긴 글처럼 그레그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가장 힘겨웠던 건 직업에 따른 계급이 뚜렷한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는 재한 선교사 월간잡지 ‘코리아미션필드’ 1912년 6월호에 실은 ‘손과 머리를 가르치다’란 기고문에서 “손을 통해 기술을 배우고, 머리는 노동과 과학에 의한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무능력하고 게으르다’는 등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평판은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인은 잔혹하고 꽉 짜인 구식 관료 체제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혜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며 “요즘은 이런 낡은 체제가 지나갔다. 이들은 잠자고 있는 재능을 개발할 기회가 있으면 (공업 기술이든 상업 거래든)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첩하게 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 총무인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의 청빙에 응한 그레그 선교사는 1906년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부임 직후 신축 회관 건축 현장에 투입된 그는 공사와 함께 목공과 철공 산업교육에도 만전을 기했다. 전기톱 등 미국산 전동공구로 가구와 기계 제작법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서구식 건물에 필요한 난방과 상하수도 배관공 등도 양성했다. 그의 제자들은 덕수궁 석조전 등 주요 시설 공사에 참여하는 기술자로 성장했다.
기독교 신앙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레그 선교사는 나사렛에서 아버지와 목수로 일했던 예수를 목공반 청소년의 본보기로 제시하며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일하도록 격려했다. 첼로와 오르간 연주에도 능숙해 주한외국인예배 때 반주자로 자주 나섰다. 이를 눈여겨본 평양 숭실중의 엘리 모우리 교육선교사의 주선으로 그는 모우리 선교사의 제자인 안익태에게 첼로를 가르쳤다.
3·1운동에서 파악한 한민족의 독립 열망에 관한 기록도 남겼다. 그레그 선교사는 1919년 8월 작성한 보고서에서 “오늘(8월 29일)은 한국인이 ‘국치일’이라고 부르는 날로 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날”이라며 “분위기는 긴장돼 있다. 지금도 창문 밖에서 일제 기마 경찰이 서성이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우리를 비롯한 선교기관이 운영하는 모든 교육 사업은 3월 1일 이후 정지 상태”라며 “대부분 학생이 휴교에 동참했다. 3·1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독신 선교사로 각종 격무에도 묵묵히 일하던 그레그 선교사는 수년 전 발병한 중풍이 악화되면서 1927년 캐나다로 귀국한다. 출국 직전 한 일간지에서 교육공로자 표창을 받은 그는 12년간 여동생의 돌봄을 받다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야기 사에리시’ ‘지네트 월터 이야기’ 등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를 꾸준히 발굴해온 저자는 그레그 선교사의 흔적을 찾아 미국 미네소타대 내 YMCA 문서보관소와 캐나다 토론토의 묘지 등을 방문했다. 저자는 “여러 서양 근대 기술을 전수한 그레그야말로 현대사의 보배 같은 존재”라며 “‘한국의 미래를 위해 공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부름에 응해 헌신한 그레그 선교사가 이제야 조명되는 건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제79주년 광복절을 기념하며 기술로 한민족의 진정한 광복에 기여한 잊혀진 선교사의 삶에 감사를 전해보는 건 어떨까.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