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 법률 쌓였는데… 여야 입법 직무유기

입력 2024-08-13 00:10 수정 2024-08-13 00:10

헌법재판소는 이명박정부 시절인 2009년 9월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일부 조항(10조 및 23조1호)이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헌법 21조)’를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시간대’의 야간 옥외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해당 조항은 결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단을 받았음에도 헌재가 개정을 권고한 시한(2010년 6월 말)이 14년이나 지난 지금도 개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같은 법률의 대통령 관저와 국회의장 공관 100m 이내 집회 금지 조항도 2022년 12월과 지난해 3월 차례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후 국회에서 단 한 차례 논의도 없었다. 헌재는 지난 5월 말까지 법률 개정을 권고했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가 입법부 본연의 책무를 방기한 채 정쟁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일하는 국회’를 내세운 22대 국회 역시 헌재로부터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을 받은 법률에 대한 대체 입법에 미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국회 사무처 법제실 집계에 따르면 헌재의 위헌,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아직 개정되지 않은 법률은 총 43건에 이른다. 하지만 국민일보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22대 국회 개원 이후 이들 법률에 대한 대체 발의는 18건에 불과했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법 조항은 바로 무효가 되지만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으면 법이 개정될 때까지는 효력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헌재는 국회에 일정 시한을 정해 개정을 권고하지만, 국회의 법 개정에 대해 강제성이 없다 보니 헌재로부터 헌법 위배 판단을 받고도 개정되지 않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국회의 임무 방기 속에 곳곳에서 입법 사각지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표 사례가 임신중절(낙태)을 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269조와 270조1항)이다. 헌재는 이 조항들에 대해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이듬해 연말까지 법 개정을 권고했지만 국회는 아직도 개정안을 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최근 한 여성이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은 사실을 공개해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해당 여성의 낙태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다 보니 경찰도 여성을 영아살인 혐의로 입건할 수밖에 없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2일 “법원이 재판 지연으로 문제가 되듯 국회 역시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입법 지연’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며 “지연된 입법은 정의로운 입법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법률 중 이미 헌재의 권고 개정 시한을 넘긴 법안은 9건에 달한다.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뿐 아니라 보안관찰처분 대상자에 대해 무기한으로 변동신고 의무를 규정한 보안관찰법 조항(6조2항, 27조2항) 역시 2021년 6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재 결정이 내려졌지만 보완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22대 국회에서도 개정안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국민의 참정권과 관련된 입법 사각지대가 수년간 방치된 사례도 있다. 재외선거인의 국민투표권을 주민등록이 되거나 국내에 거소신고가 된 투표권자로 제한하는 국민투표법(14조1항)에 대해 헌재는 2014년 7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10년이 지나도록 개정이 안 됐다. 22대 국회에서 그나마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투표권자도 재외투표인 등록 신청을 하면 투표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헌재 결정에 따라 법 개정이 필요한 법률의 상당수는 법제사법위원회와 행정안전위원회 소관인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대상 법률 중 법사위 소관 법률이 16건, 행안위 소관 법률은 13건으로 보건복지위(6건), 정무위(2건) 등 다른 상임위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22대 국회 법사위와 행안위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민생회복지원금지급 특별조치법) 등 정쟁 성격이 짙은 사안들이 집중되다 보니 다른 법안들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회에서 대체 입법이 지연되는 주요 이유는 의원들의 ‘여론 눈치보기’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당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헌재에서도 꾸준히 헌법불합치 법안들에 대한 보완 입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의원들도 현황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굳이 내가 총대 메고 나서야 하느냐’는 기류가 있다”고 전했다. 특히 성범죄 관련 조항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기피 정서가 강하다.

헌재는 2022년 11월과 지난해 6월 아동·청소년 음란물 소지죄로 형이 확정된 자를 각각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 임용 결격사유로 규정한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조항에 대해 헌법에 보장된 공무담임권(헌법25조)을 침해했다고 결정하면서 국회에 올해 5월 말까지 개정할 것을 권고했지만 여야 누구도 법 개정안을 내지 않았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성범죄자의 헌법상 공무담임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 개정안을 낸다면 ‘성범죄자들을 공무원 만들어주려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질 텐데 어느 의원이 그걸 감당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헌재가 헌법 위배 판단을 내린 법률을 국회가 개정하도록 강제성을 부여하기도 쉽지 않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가 국회가 만든 법률을 위헌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삼권분립에 따라 법률 제·개정은 엄연히 국회의 권한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보완 입법을 국회에 촉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종선 정우진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