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뺨치는 국내 기독교 순례길 밟아보자

입력 2024-08-08 03:01
광주광역시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인 로버트 윌슨(한국명 우일선) 선교사 사택 모습. 국민일보DB

“한국은 유럽 국가 외에 두 번째로 많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한 국가입니다.” 하이메 알레한드레 스페인 관광청 아시아디렉터는 지난 5월 열린 2024 서울국제관광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의 순례길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다. 지난해 스페인을 방문한 한국인 여행객 수는 43만명.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다. 한국인의 ‘순례길 사랑’은 제주 올레길을 탄생케 한 힘이기도 했다. 최근엔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종교단체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인천 주안중앙교회(박응순 목사)는 지난달 13일 서울 정동길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에 참여한 신승철(61) 집사는 7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기독교 유적지를 둘러보며 우리나라는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기독교 순례길 수요가 증가하면서 순례자들을 이끌 해설사 양성도 본격화하고 있다. 6일 ㈔한국순례길(이사장 전재규)은 서울 동작구 숭실대에서 ‘한국기독교 역사문화해설사 창작 과정’을 출범했다. 12주 과정 교육을 마치면 국내 선교지 투어 프로그램의 해설사로 활동할 수 있다.

전남 신안군 증도면에 조성된 ‘섬티아고 순례길’ 중 베드로의 집 전경. 국민일보DB

이미 대구와 전남 신안, 광주광역시 등에는 지자체와 지역교계가 조성한 기독교 순례길이 있다. 신안군 5개섬을 잇는 ‘섬티아고 순례길’은 적지 않은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담긴 대구의 청라언덕 순례 코스는 관광객이 즐겨 찾는다. 이 길은 제중원(현 동산의료원)과 애락원 등을 잇는다.

전남 순천시 매산등 일원에는 순천시와 한국관광협동조합이 협력해 조성한 성지순례길이 있다. 매산등 성지순례길은 100년 전 선교사가 걸었던 길을 따라 교회, 교육, 주거, 의료구역과 기도산을 탐방하는 5개의 코스로 구성돼 있다. 제주 순례길은 기독교인들의 순교터와 부흥사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코스다. 제주의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창조의 섭리를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강사겸 장로와 서울 연동교회 교인들이 2021년 대구 중구 청라언덕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강 장로 제공

강사겸(63) 서울 연동교회 장로는 국내 기독교 순례지 탐방 마니아다. 주말이면 교인들과 함께 서울은 물론 대구 광주 신안 여수 등에 마련된 순례지를 찾고 있다. 강 장로는 “항공사 직원으로 일하며 오대양 육대주의 명소를 두루 다녀봤지만 한국에 조성된 순례길도 해외와 비교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며 “골목이나 건물마다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면 신앙 성장에 큰 자극이 된다”고 전했다.

인천시는 최근 ‘종교 관광 도시’로의 변화를 천명했다.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 성공회 등 여러 종단과 연계해 개항장 성지순례 코스를 조성하고 있다. 현재 시행 중인 모바일 스탬프 투어를 강화도 등 섬 지역 순교지로 확대하고 종교 관련 안내서를 제작해 배포할 예정이다. 이런 흐름은 유정복 인천시장이 천명한 ‘제물포 르네상스’에서 종교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천 중구 개항장에서 복합문화공간 ‘개항도시’를 운영 중인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전 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소장은 “교단별 역사보존 사업은 교단 소속 순교자나 부흥사의 유적지를 발굴하고 이를 기반으로 순례길을 조성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며 “여기에 지자체나 중앙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이 늘어나면서 빠르게 활성화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국내 종교 순례길 조성에 관한 관심이 적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유인촌 장관의 특별 지시로 국내 종교 순례길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