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참 악마가 ‘유혹자 대학’ 출신 신참에게 한 성가신 책에 대한 편지를 쓴다. 이 책은 ‘나니아 연대기’ 작가인 CS 루이스(1898~1966·사진)의 작품 ‘이야기에 관하여’다. 각종 장르의 작품에서 문학적 가치와 기독교적 교훈을 캐낸 루이스의 문학비평서다. 그럼에도 “요새 한국에서 누가 책을 읽느냐”며 이를 평가절하하려는 신참을 두고 고참 악마는 “머리에 유황도 안 마른 젊은것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혀를 찬다. “유튜브니 뭐니 해도 결국 깊은 정보는 여전히 책에 담긴 걸 몰라서 그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탄 맙소사! 이런 느슨한 자세로 제대로 된 유혹자 노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일갈한다.
‘루이스 덕후’(마니아)라면 이쯤에서 눈치챘을 것이다. ‘C.S. 루이스의 인생 책방’(비아토르)에 실린 이 편지는 루이스의 대표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패러디한 것이다. 편지의 진짜 발신자는 국내에 소개된 루이스의 책 여러 권을 우리말로 옮긴 홍종락 번역가다. 기독교 분야 주요 외서를 다수 번역한 그는 자신을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부른다. 애독자이자 번역자, 연구자로 루이스의 글을 꾸준히 음미할 수 있어서다. 이번 책은 ‘오리지널 에필로그’에 이어 번역가로서 루이스를 소개한 두 번째 작품이다. ‘개혁신앙’ 등 기독 매체에 기고한 글을 엮었다.
루이스의 저술과 사상, 독서법을 다룬 책에는 그간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루이스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루이스가 58세에 아내로 맞은 미국 여성 조이 데이빗먼이 순수한 의도로 그에게 접근했는가를 논하는 이야기다. 친구로 지내던 두 사람은 1956년 등기소에서 혼인신고를 한 뒤 이듬해 암으로 입원한 데이빗먼의 병실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데이빗먼은 잠시 호전됐던 건강이 다시 악화돼 1960년에 별세한다.
병실 결혼식 이후 루이스의 사랑에 대해선 거의 이견이 없지만 그 이전은 ‘애정 없는 결혼’일 것이란 시각도 존재한다. 두 아들을 둔 이혼녀 데이빗먼이 영국 체류를 위해 루이스를 철저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영국 역사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2016년 발간한 ‘C.S. 루이스’에서 “데이빗먼은 루이스의 문학과 신앙뿐 아니라 금전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당시 루이스의 여러 친구는 “데이빗먼이 루이스에게 도덕적 부담을 끌어내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했다”고 믿었다. 이들이 볼 때 데이빗먼은 “자신과 두 아들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나선 ‘꽃뱀’(gold-digger)”일 뿐이었다.
저자는 미국 신학자 해리 리 포우가 2022년 펴낸 루이스 전기의 내용을 들어 맥그래스의 주장을 반박한다. 영국 체류를 돕기 위해서라면 결혼이 아닌 다른 방법도 가능했지만 루이스는 이를 전혀 고려치 않았다. 혼인 사실을 비밀에 부친 것 또한 단순한 행정조치 이상임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루이스는 자신의 결정을 기사도적 배려 같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왜 데이빗먼에게만 특별한 배려를 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워 결혼 사실을 비밀로 했다”며 “자기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루이스는 데이빗먼의 암 투병 사실을 접하면서 자신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는 1957년 영국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잃어버릴 것이 분명한 대상은 금세 사랑하게 된다”며 죽음을 앞둔 아내를 향한 애정을 명확히 표현했다.
이밖에도 책에는 루이스 작품의 이해를 돕는 쓸모 있는 정보가 여럿 수록됐다. ‘그 가공할 힘’과 ‘인간 폐지’처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주요 작품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독서 모임 가이드’ 등도 실렸다. 덕후만 알고 즐기던 루이스 작품의 비화와 독서 비법을 상세히 소개한 일종의 비법서인 셈이다. “루이스를 재료로 호화롭게 차려낸”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루이스의 책에 손을 뻗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