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서 올라온 탈북 노숙인… 그의 ‘새터’가 된 인천공항

입력 2024-08-07 00:02 수정 2024-08-07 16:22
인천국제공항 지하 1층 버스 승차장 인근 대합실에서 4일 담요를 덮고 누운 노숙인 옆으로 여행객들이 캐리어를 끌며 이동하고 있다. 무더위를 피해 외국으로 떠나는 여행객과 공항에 터를 잡은 노숙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전국 낮 최고기온이 36도까지 치솟은 지난 4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은 출입국 수속을 밟는 해외여행객으로 북적였다. 찜통더위를 피해 외국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다. 9살짜리 딸과 함께 공항을 찾은 황모(42)씨는 “이번 여름은 유독 무더워서 한국보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으로 피서를 가려 한다”고 말했다.

설레는 표정의 여행객만 공항을 찾는 건 아니다. 곳곳에서 더위를 피하려고 모여든 노숙인이 눈에 띄었다. 남루한 차림의 이들은 여행객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노숙인들은 주로 공항 지하 1층 버스 승강장 대합실 근처 의자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잠을 청했다. 한 노숙인은 공항 카트에 짐을 싣고 살림을 차리다시피 했다. 그가 누운 의자 밑에는 깍두기 등 각종 반찬통이 놓여 있었다.

폭염을 피해 공항에 터를 잡은 노숙인 중에는 탈북민도 있었다. 함경북도 샛별군에서 거주하다 2014년 탈북한 정모(45)씨는 “지난 5월까지 대전에서 노숙했는데 너무 더웠다. 장마철에 접어들자 머물던 텐트에 물이 새고 벌레가 꼬여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결국 정씨는 주변 노숙인들에게 문의해 인천공항으로 넘어왔다. 그는 “비 맞을 걱정도 없고, 무엇보다 시원해서 좋다”고 말했다.

정씨는 탈북 이후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적응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정씨는 “북한에서 농사만 지었다. 탈북 이후 생계를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려니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정씨처럼 역대급 더위가 이어지면서 공항까지 찾아오는 노숙인은 늘어나는 추세다. 인천터미널2교회 이여호수아 선교사는 “최근 기온이 오르면서 공항 내 노숙인이 증가하고 있다”며 “못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에 따르면 15~20명가량의 노숙인이 공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선교사는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 해외 선교를 위해 인천공항을 찾았다가 쓰레기통을 뒤지던 노숙인을 목격했다. 이후 이들을 찾아다니며 매일 김밥과 과일 등 먹을거리를 나눠준 지 벌써 4년이 됐다.

노숙인들은 서로 활동 공간이 겹치지 않게 공항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공항 제2여객터미널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옆자리엔 탈북민 정씨가 주로 지내고, 1층 안쪽 자리엔 30대 남성이 터를 잡았다. 이 남성은 몇 달 전 부모가 갑자기 사망한 뒤 공항으로 왔다고 한다. 이 선교사는 “인근 편의점 점주가 후원하는 물품과 인천국제공항제2교회, 5K 사역팀 등의 지원으로 이들을 돕고 있지만, 혼자 노숙인을 다 챙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노숙인들이 여행객이나 공항 직원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공항 측도 노숙인 유입을 막거나, 이들에게 퇴거 조치를 하진 않는다. 공항 관계자는 “노숙인이 절도 등 범행을 저질렀을 때에만 경찰에 인계조치를 하고 있다”며 “전문기관과 연계해 정기 상담을 진행하고, 시설 입소와 치료 등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글·사진 한웅희 기자 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