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기도 부천시 한 카페에서 만난 송정호(71) 부천상동교회 원로목사는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89만5982원. 은행 애플리케이션에 표시된 입금 내용이 선명하게 보였다. 3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한 은행이 법원 판결을 이행한 결과였다. 송 목사는 전화 금융사기로 손해를 입었지만 변호사 없이 스스로 법을 공부해 소송에서 이겼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건 2021년 10월 10일 오전 11시였다. 딸의 이름으로 도착한 문자메시지에는 “아빠, 액정이 깨졌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휴대전화를 복구하기 위해 앱을 설치하고 송 목사의 통장에서 돈을 꺼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딸이 친구 집에 있다고 생각한 송 목사는 의심 없이 앱을 설치하고 주민등록번호와 비밀번호를 보냈다.
다음 날 송 목사는 자신의 계좌에서 80만원이 인출되고 300만원의 대출이 발생한 사실을 발견했다. “늦게 얻은 딸이라 애지중지 키웠어요. 주로 문자로 소통해 왔던 터라 딸의 메시지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죠. 어처구니없는 일에 당했다는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송 목사는 경찰에 신고하고 구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을 발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본인 확인 조치를 확실히 해야 하며 의심스러운 거래가 있으면 이체나 출금을 지연시키거나 일시 정지해야 한다. 이 과정이 빠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2022년 1월 송 목사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대상은 전화 금융사기에 활용된 은행이었다. 그러나 1심에서 법원은 은행 측 손을 들어줬다. 은행이 비대면 실명확인 절차를 준수했다고 판단했다. 송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항소를 결심했다. 수차례 법원을 드나들었고 법 공부에 파고들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소비자기본법과 금융소비자보호법이었다. ‘금융회사는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문구였다. 송 목사는 이를 토대로 항소 이유서를 썼고 서울고등법원은 송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2021년 10월 10일부터 11일 오전 9시까지의 거래를 그대로 넘어간 것은 이상하다”며 은행이 자체 점검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법원은 보이스 피싱으로 발생한 대출이 무효임과 함께 피해액 3분의 1을 송 목사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지난 5월 22일, 사건 발생 2년 7개월 만에 송 목사는 승소했다. 은행 측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지난달 31일 판결이 확정됐다. 송 목사는 “300만원 정도 금액이면 변호사 수임료가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보이스 피싱범은 더 활개를 치고 금융기업도 문제의 심각성을 하찮게 보고 악순환이 계속된다”며 “노인들이 혹여 비슷한 실수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대응법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천=글·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