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여름 대추처럼

입력 2024-08-07 00:36

담벼락 너머로 뻗어 나온 얇은 가지에 병아리콩만 한 대추알이 조랑조랑 달렸다. 그 모습이 반가워 이글거리는 볕이 정수리에 꽂히는 와중에도 싱긋 웃음이 났다. 이따금 마주치는 대추나무는 오늘도 부지런히 열매를 부풀린다. 변함이 없는 사물의 세계에서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발견하는 재미는 “네가 벌이는 작은 소동을 내가 알아챘어”라고 속삭이고픈 은밀함이 있다. 몇 번의 뙤약볕과 세찬 비바람이 지나고 나면 연두색 구슬은 붉은 반점을 선보이며 가을을 알려오겠지. 그때까지 또 한 철 최선을 다해 살아갈 대추나무에 덩달아 힘이 솟는다.

이 열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오래전 광화문에서부터다. 고층빌딩 외벽에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의 첫 구절이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간결하고도 강렬한 세 줄의 문장은 광화문 일대를 메운 번잡한 사물들을 다 지워버리고 대로변 한복판에 나를 홀로 세웠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은 인생을 가꾸는 값진 거름이 될 거라고, 뙤약볕이 있는 후에야 비가 달고 먹구름에 가려야 햇볕 한 줌에 귀함을 느끼는 거라고 위로했다. 아마도 시는 나를 비롯해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서 대추알처럼 붉어졌을 것이다.

작은 열매도 살을 찌우고 그윽한 향기와 맛을 내기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던지는데, 나는 왜 몸을 사리고 숨죽여 떠는가. 알알이 들어차지 못하고 엉성하게 설익은 마음을 들킬 때면 시가 떠올랐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열린 대추 한 알은 새틋한 자극을 주고 고난을 견디는 힘이었다. 지금 그 거리에는 어떤 문장이 나부끼며 사람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고 있을까. 나 오늘은 어떤 시 한 구절에 호흡을 가다듬을까. 온몸으로 세상과 통한 대추 한 알처럼, 절절하게 한 시절을 품는 대추 한 알처럼 살고 싶은 뜨거운 계절이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