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이타적이고 개방적인 가정 많아져야 우리 사회 행복해져”

입력 2024-08-06 03:04
저출생·고령화를 비롯해 다양한 이슈로 골머리를 앓는 한국 사회에 ‘사랑이 담긴 지혜’를 제시하기 위해 104세 철학자와 90세 신학자가 만났다. 김형석(104) 연세대 명예교수와 박조준(90) 웨이크신학원 명예총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이뤄진 만남은 올해 구순(九旬)을 맞은 박 총장이 ‘백 년의 지혜’을 듣고자 김 교수를 청한 자리다. 학계와 교계의 큰 어른인 두 노학자는 저출생 문제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조언도 다수 내놨다. 북한 평안남도가 같은 고향이면서 탈북민이기도 한 두 사람은 한반도 통일에 대한 고견도 제시했다.

김형석(오른쪽) 연세대 명예교수와 박조준 웨이크신학원 명예총장이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대담에서 환담하고 있다. 올해 구순을 맞은 박 총장은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평소 흠모해왔다”며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교수님께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권현구 기자

-학계와 교계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두 분의 인연이 궁금하다.

△김형석 교수=연세대에 있을 때 총장님이 교회에 계셨기에 청년들 강연이나 신학교 관련 행사에서 자주 뵈었다. 밖에서 보기엔 서로 분야가 다른 것 같아도 뵌 지는 참 오래됐다. 학교에선 항상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목회자와 마주하면 다른 분야를 배울 수 있어서 만남이 큰 도움이 됐다.

△박조준 총장=저는 교수님의 깜깜한 후배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영광이고 기쁨이다.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함께 ‘한국 철학의 1세대’로 불리지만 저는 교수님의 책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다. 베스트셀러가 여러 권인 교수님 책도 대부분 읽었다. 그렇게 학문적이지 않으면서도 일상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라, 읽고 들으면서 항상 감동했다. 설교할 때도 큰 보탬이 됐다. 평소 흠모하면서 생각한 게 ‘저 어른처럼 계속 활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다.

△김 교수=살다 보니 ‘신앙을 가진다는 건 곧 늙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도 영적·정신적 성장은 계속된다.

△박 총장=저도 동의한다. 성경에도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는 말씀이 있다. 저 역시 후배 목회자에게 목회를 가르치지만 교수님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그 영향을 끼치는 게 엄청나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를 전한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우리 사회 저출생 문제의 가장 큰 원인과 해법은 무엇일까.

△김 교수=40~50년 전만 해도 교회가 앞장서서 아들딸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운동을 했다. 이때를 돌이켜보면 우리 기독교인이 역사를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이 자연의 질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살피듯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길게 봐야 한다. 그간 ‘너무 짧게 본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한국교회가 그간 기독교인에게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음도 절감한다. 교회가 성도들이나 다음세대를 교육할 때 인간에게 주어진 신앙의 제1조건을 꼭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그 조건은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가치다. 이를 기독교가 세상에 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방관만 한 게 아닌가 싶다.

△박 총장=한국뿐 아니라 세계도 저출산 추세로 고전하고 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생활 수준이 올라가는 건 좋은데 극단적 이기주의도 퍼지는 것 같다. 요즘 국내에선 자녀 교육비가 굉장히 많이 든다. 맞벌이한다고 해도 여기에 비용을 들이다 보면 부부가 누릴 여유가 줄어든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의 이해관계는 얼마나 밝은가. 아이 낳아봤자 별거 없고 고생만 하지 않느냐고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게 하나님 뜻이나 정작 내가 사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겨 아이를 낳지 않는 현상이 된 것이다.

△김 교수=교회와 사회를 볼 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이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키우는 전통적 관점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자연 질서라기보단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존엄스러운 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총장님 말씀대로 극단적 개인주의로 빠진 경우는 가정 때문에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 불행한 가정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이들 가운데는 가정이란 무거운 짐을 지려 하지 않는 경우가 적잖다. 하지만 사랑으로 그 짐을 진 이들 때문에 자신이 태어났고 지금껏 살아왔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며 사회에 봉사하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이타적이며 개방적인 가정이 많아져야 우리 사회가 행복할 것이다. 기독교인이 이런 가정의 모범을 보이며 건강한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에 그간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라도 기독교인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박 총장=교수님 말씀처럼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행복이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의 근원은 돈이다.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들 하지만 행복이 꼭 돈에 달린 건 아니다. 돈은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고민과 분쟁의 씨앗이기도 하다. 행복은 사랑에서 온다. 자녀를 사랑하고 키우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쁨과 행복을 상실하는 세태가 안타깝다.

△김 교수=오래 살다 보니 인생은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30세쯤 되면 개인이 아닌 더불어 사는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욕심만으로 혼자 살면 한계가 오는 시기다. 이웃, 친구와 더불어 살고 공존할 때 행복을 느낀다. 정년퇴직하고 60세쯤 되면 갖기보다 더 많이 줄 때 행복을 느낀다. 100세 넘게 지금껏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낳고 길러주며 선생님이 도와줬고 친구들이 함께 일했다. 또 사회에서 나름대로 어울려 일해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세상에서 그저 가르치는 일 한 가지만 했을 뿐이다. 내 인생을 만든 나머지 99가지는 각 분야에 성실히 헌신하는 이들의 도움을 감사하게 받아들여 완성된 것이다.

나만 마음 편히 살고 남들은 불행해도 상관없다는 자세로는 행복할 수 없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주어진 사랑의 짐을 지자. 멀리 있는 거창한 짐을 지자는 게 아니다. 가족을 꾸리고 어린 자녀를 키워 제 역할을 하게 해 주는 것, 이것이 인간이 사는 본질 중 하나다. 출산하든 입양으로 양육하든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철들고 인간으로서 성숙한다. 삶의 열매는 나 스스로 맺는 게 아니다. 행복은 줌으로써 받는 것이다. 이기주의적 행복은 자기 자신을 잃게 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년을 맞았을 때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게 결혼 안 하고 아이 안 키운 거라고 말했다.

△박 총장=“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는 교수님 말씀이 성경에도 나온다. 봉사하고 헌신할 때 오는 기쁨과 행복이 있다. 이기적인 기쁨만 추구하다 보면 행복에도 한계가 있다.

-최근 북한은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고 천명했다. 통일 한국을 위해 한국 사회와 교회가 노력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김 교수=나와 같이 북한이 고향인 안병욱 선생과 종종 나눈 이야기가 있다. ‘북한에서 쫓겨났을 때 대한민국이 우리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세계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대한민국을 위해 뭔가 도움을 주고 싶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통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자주 했다. 안 선생이 10여년 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강원도 양구에 묻혔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에게 통일 소식을 전하면 좋을 텐데 잘 안 될 것 같다.

그간 여러 정부가 통일에 대한 노력을 많이 해왔지만 정작 정치하는 이들은 북한 정권과 동포를 착각하는 경우가 적잖았다. 공산주의를 체험한 사람은 북한에 변화가 오지 않는 한 통일이 어렵다는 걸 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교류를 한 뒤 “15년쯤 지나 북한 경제가 우리 경제와 비슷하게 되면 그때 통일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상당히 의미 있는 견해다. 왜냐하면 통일은 힘이나 협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균등한 사회가 될 때 온다.

이후 공산주의를 모르는 여러 사람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도왔으나 북한 정권은 경제 원조로 무기 개발에 나섰다. 자유 세계에서 돈 끌어오는 게 북한의 수입 수단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국교회도 쌀 나눔에 적극 나섰다. 가장 잘못 생각하는 게 북한 정권이 북한 동포를 자유롭게 해주면 통일이 온다는 것이다. 정권으로만 통일하려면 안 된다.

기독교인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 동포를 정말 많이 사랑해야 할 것 같다. 공산 정권은 언제나 고립될 때 자멸했다. 중국도 덩샤오핑의 정책이 계속됐으면 변했을 거다. 소련은 벌써 해체됐다. 북한 동포를 정말 사랑한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산다는 걸 자꾸 알려야 한다. 인적·문화 교류를 하면서 자유 세계를 계속 알려준 뒤 동등한 위치에서 경제 교류를 하면서 동반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정치는 그다음에 나서야 한다.

△박 총장=저는 평남 강동이고 교수님은 평남 대동으로 고향이 인근에 있다. 저 역시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순진한 생각 같지만 저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장한다고 본다.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해방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소련 붕괴도 당시엔 상상도 못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겠으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때에 독재 공산 정권은 무너질 거라 본다.

△김 교수=저는 이를 섭리로 받아들인다. 교회 밖에는 섭리란 개념이 없지만 역사의 흐름이 그렇다. 물이 높은 데서 아래로 흘러가듯 자유와 정의도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가게 돼 있다. 소련이 그랬듯 북한에 자유와 사랑이 물 흐르듯 흘러가면 자연히 해체된다.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다. 세계 속에서 한국을 보고 역사의 과정으로서 한국과 공산주의를 보면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전쟁을 못 하도록 막는다면 안에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박 총장=역사와 문명의 이기는 아무리 통제해도 막을 길이 없다. 저도 북한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남 방송을 들었다. 자유라는 건 맛을 알면 생명까지 내던지게 된다. 북한 역시 아무리 통제해도 탈북민 발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김형석(왼쪽) 연세대 명예교수와 박조준 웨이크신학원 명예총장이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대담에서 저출생·고령화 등 여러 한국 사회 이슈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권현구 기자

-급속 성장 이후 하락세를 맞은 한국교회를 향한 조언이 있다면.

△김 교수=한국교회 규모가 줄었다고 해서 기독교가 약화한 건 아니라고 본다. 교회가 기독교 정신을 줬기에 사회가 이만큼 자랐다. 세계를 이만큼 키운 건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서 나왔다. 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출발도 기독교가 이끌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앞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교회 수는 줄지언정 교회를 통해 사회에 기독교 정신을 살려 나가야 하겠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목적은 교회가 아니었다. 항상 하나님 나라를 말씀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진리를 교리보다 높이 세우고 인간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 이것이 교회 수가 적어지더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는 길이다. 이럴 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는 정치가 학자 예술가 등이 존경받을 것이다. 희망은 이제부터다. 교회와 교인 수가 준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수 정신을 키워서 사회에 전수할 수만 있다면 한국교회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박 총장=교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 정신에 의하면 교회는 숫자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곳은 아니다. 솔직히 그간 한국교회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인식으로 부흥했다. 그리스도 정신이 아닌 눈에 보이는 데만 관심을 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스승이 고난당하고 십자가를 진다고 하니 다 도망갔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했다. 저 역시 한국교회의 목사이지만 부끄럽다.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다.

-식상한 질문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는지.

△김 교수=100세가 넘으니 가장 많이들 묻는 게 건강 비결이다. 그때마다 ‘건강 생각을 안 하니 오래 산다’고 답한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학교에서 나보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도 포기했을 정도다. 의식을 잃거나 뇌사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받고 자랐다. 야곱이 벧엘에서 기도하듯 초등학교 졸업 후 의지할 곳이 없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셔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게 해준다면 내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욕심의 기도였다.

14살 때 한 이 기도 이후 지금껏 살다 보니 하나님은 약속을 지켜주셨다. 나는 내 걱정을 잊고 일만 하며 살았다. 세상에서 보니 일을 사랑하는 이가 건강하더라. 건강 걱정 안 하고 일 걱정 하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다. 종종 원로목회자 모임에 가서 강연하는데 그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게 목회자들이 너무 빨리 늙는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신앙인은 은퇴가 없다. 저는 65세 정년퇴직 이후부터 80세까지 일을 가장 많이 했다. 80~90세 때는 그 상태의 연장이었다. 90대도 늙은 줄 알고 주어진 일이나 끝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일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생겼다. 그렇게 95세까지 살았는데 그때는 몸이 자꾸 쳐졌다. 정신은 여전해도 몸이 못 따라온다는 생각이었다.

97세 때 한 일간지에서 좋은 저서를 남긴 국내 저자 10인을 발표했는데 그 명단에 제가 포함됐다. 대부분 60~70세인데 이 나이에 어떻게 들어갔나 싶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내가 앞섰다고 위로했다. 그 사상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국적 현실에서 기독교 가치관과 인생관이 무엇인가’를 다룬 것이다. 내가 찾아가 얻은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게 찾아와 이 사회와 시대를 위해 주신 사상이다. 이 사상으로 지금까지 왔다. 밖에서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내 건강의 비결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기실 일을 사랑한 건 내게 14세 때 주어진 남모르는 사명이었다. 목사님들도 사회에서 할 일이 참 많다. 더 많이들 일해줬으면 좋겠다.

△박 총장=교수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분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60세가 넘어 나이가 들면 인지에 어려움이 온다. 선명한 사상으로 후대에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신 거다. 저 역시 교수님처럼 되는 게 소원이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모세처럼 120세까지 사명에 충실하게 사회에 좋은 말씀 많이 남겨 달라.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