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최고기온이 섭씨 35도까지 오른 지난 1일. 경기도 안성에 있는 체험목장 ‘농협안성팜랜드’ 마구간을 찾았다. 뙤약볕을 피해 실내로 온 말들 머리 위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숨을 헐떡이며 찬물을 맞는 갈색 승용마(사람이 탈 수 있는 말) 사이로 털이 하얀 백마 ‘백광’도 있었다.
고삐에 ‘2호 명예 경주마’ 표식이 붙어있는 백광은 경주마로 2000년대를 풍미했다. 후미에 있다가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치고 나가 역전승을 거두는 모습으로 ‘은빛 가속도’란 별명이 붙었다. 2011년 은퇴한 백광은 제주도 한 목장에서 씨수마(혈통이 우수한 품종을 후대로 보내는 말)로 지냈다. 이후 한국마사회의 명예 경주마로 선정돼 지난 4월부터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박기준 안성팜랜드 승마센터 교관은 “관람객과 함께 승마·먹이 체험 등을 하는 일반 말 43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백광은 경마장이 위치한 ‘과천벌’을 주름잡은 명마였다. 2005년 데뷔해 2006년 주요 대회 3관왕을 거머쥐며 당대의 경주마로 군림했다. 승패보다 질병을 이겨낸 ‘불굴의 경주마’로도 명성을 떨쳤다. 경주마에 치명적인 앞다리 발굽 질병으로 한때 안락사 위기에 놓였지만, 줄기세포 치료로 병을 극복하고 2009년 복귀했다. 전성기 시절 실력으로 재차 우승을 거머쥐며 ‘집념의 경주마’란 별명도 얻었다.
이제 백광은 달리고 싶을 때 달리고 쉬고 싶을 때 쉰다. 배고프면 건초를 먹고 졸리면 앉아서 잔다. 백광을 관리하는 김민서 안성팜랜드 승마센터 코치는 “사람 손에 억압되지 않고 그냥 뛰고 싶을 때 뛰고 숨이 차면 알아서 쉬게끔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 경주할 때는 온 힘을 다해서 뛴 뒤에 경기가 끝나면 마방에만 있었잖아요. 이제는 방목하며 자유롭게 사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은 말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다. 말은 사람보다 체온이 2도가량 높아 더위에 약하다. 특히 백광과 같은 늙은 말(老馬)에게 무더위는 치명적이다. 말의 수명은 통상 25~35년. 20살인 백광은 이곳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자칫 더위를 먹거나 수분 부족으로 산통(배앓이 증상)이 오면 위험할 수 있다.
백광은 말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코치 2명이 돌아가며 살핀다. 마방 앞엔 업소용 대형 선풍기가 놓였고, 물을 마시면 자동으로 채워지는 장치도 설치됐다. 평소 방목지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생활하던 백광은 요즘 다른 말들과 함께 마방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다. 김민서 코치는 “일과는 휴식이 거의 80%”라며 “여름이라 체력이 쉽게 떨어질 수 있어 더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백광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온 선배 ‘1호 명예 경주마’ 청담도끼도 마구간에서 건초 먹기에 한창이었다. 청담도끼 옆에선 작은 체구의 염소 ‘흰둥이’도 함께 건초를 뜯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청담도끼와 함께 안성팜랜드로 보금자리를 옮겨 마방에서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단짝 친구다. 박기준 교관은 “청담도끼가 현역 시절에 항상 서로 같이 있었는지, 어느 한 쪽이 자리를 비우면 서로를 막 찾는다”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의지하는 관계”라고 했다.
올해 10살인 청담도끼는 전성기(5~6살)를 갓 넘긴 2022년 8살 나이로 은퇴했다. 박 교관은 “운동선수로 치면 30대에 은퇴한 셈”이라고 했다. 그동안은 오로지 빨리 달리는 훈련만 받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거친 면이 없지 않았다. “여긴 승마 체험장이라 말들이 평온하게 있어야 하거든요. 갑자기 앞발을 기립하면 다른 말도 놀라서 같이 드니까.”
청담도끼의 은퇴 생활도 어느덧 10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요즘 취미는 ‘사람 구경’이다. 아빠 손을 잡고 걷는 영유아나 초등학생을 보면 흘낏거린다. 하루에 한 번씩 훈련도 한다. 사람이 타지 않은 상태에서 끈만 연결한 채 달리는 훈련이다. 김민서 코치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위에서 쿵쿵거릴 필요가 없다”며 “날이 선선하면 방목장을 걷거나 사람 구경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과거 백광과 청담도끼와 함께 활동했던 경주마 중엔 은퇴 후 험난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퇴역 경주마가 도축돼 펫푸드(동물 사료)로 사용되거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사고사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한국마사회는 농협경제지주와 함께 지난해부터 명예경주마 사업을 시작했다. 긴 달림을 멈춘 은퇴 경주마들이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말에게 필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언제든지 먹을 물과 풀.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환경. 함께 뛰놀 수 있는 친구들이다. 넓은 방목지와 마구간, 전문 관리 인력이 있는 안성팜랜드는 이런 요건을 모두 갖췄다. 백광과 청담도끼는 하루 세끼 사료를 먹을 때도 현역 시절처럼 근육과 발굽, 아킬레스건에 좋은 영양제들을 함께 먹는다. 마구간 한쪽엔 팬들이 보내준 당근과 양배추 상자가 가득했다. 박 교관은 “경주마 시절 팬들이 자주 찾아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간다”며 “우리끼리는 우스갯소리로 인생(人生)보다 마생(馬生)이 더 나은 거 같다는 말도 한다”고 했다.
안성팜랜드에는 지난 2일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다. 3호 명예 경주마로 선정된 ‘당대불패’가 오면서다. 2010년대 최고의 국산마로 불렸던 당대불패도 적응 기간을 거쳐 올가을부터 다른 경주마들과 함께 방목지에서 뛰놀 예정이다. “말도 사람이 오면 좋아합니다. 행복하게 관리를 해주면 좋아하고요. 말들도 다 압니다.” 경주로를 질주했던 명예 경주마가 초원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누구나 이곳을 찾아 만날 수 있다.
안성=글·사진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