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걱정 않고 악역 연기… 그래서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

입력 2024-08-05 05:29
연극 무대에서, 영화와 드라마에서 30여 년을 ‘워커홀릭’으로 지내온 유재명은 연기가 운명인 것 같다고 했다. 최근 들어 체력적, 정신적 한계를 느끼는 탓에 일을 줄여야겠다면서도 “좋은 작품이 오면 고민하면서도 또 할 것 같다”고 했다. 스튜디오 X+U 제공

“좋은 분들이 ‘유재명이란 배우가 꼭 필요한데 도와주시겠습니까’하면 ‘예 도와드리죠’했어요. 그렇게 그냥 한 작품, 한 작품 하다 보니 많은 작품을 하게 됐더라고요. 20년간 했었던 연극도 똑같았어요. 누가 도와달라 하면 달려가서 도와주고, 같이 무대 만들고 글 쓰고 했는데, 그게 영상으로 그대로 넘어온 것 같아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배우를 꼽으라면 유재명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듯하다. 그의 말처럼 그는 선역부터 악역까지, 비중이 작은 배역부터 큰 배역까지,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한 해에도 여러 작품에 출연해왔다. 그때마다 얼굴을 갈아 끼운 듯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 ‘천의 얼굴’이란 수식어도 따라다닌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재명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별로 없다. 직감적으로 선택하는 편”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일까, 작품이 공개되고 나면 시청자에게 꽤나 충격을 줄 만한 희대의 성범죄자 김국호 역도 별다른 고민 없이 맡았다. 그가 ‘노 웨이 아웃: 더 룰렛’(노 웨이 아웃)에서 연기한 김국호는 수많은 여성을 성폭행하고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들의 명함이나 명찰을 기념품처럼 모으는 희대의 흉악범이다. 13년을 복역하고 나와 ‘죗값은 다 치렀는데 왜 경찰이 내 자유를 구속하냐’고 큰소리치는 인물이다.

유재명은 “감독님이 (김국호 역에) 저밖에 안 떠올랐다고 하시더라. 당시 제게 들어온 대본 중 가장 매력적이어서 과감하게 선택했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걱정했다”며 “저는 그 작품이 나란 배우를 필요로 하고, 또 제가 읽었을 때 너무 좋으면 이미지 생각 않고 그냥 한다. 그래서 대중도 좋아해 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이런 악역 이미지를 상쇄시킬 좋은 작품을 내년에 준비해놔서 전혀 부담은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달 31일 디즈니플러스 등에서 공개된 ‘노 웨이 아웃’은 김국호의 목숨에 200억원의 공개 살인 청부가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린 드라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인물과 김국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백중식(조진웅)과 같은 경찰들, 이 상황을 이용해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이상봉(김무열), 안명자(염정아)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벼랑 끝에 몰린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상황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유재명은 이 같은 작품의 구조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봤다.

그는 “‘노 웨이 아웃’을 보다 보면 등장인물이 다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김국호 같은 태생적 악마뿐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만들고, 수호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망에 휩싸여서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고,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구조가 매력적인 작품”이라며 “우리가 만든 사회란 구조 자체가 괴물이라 ‘노 웨이 아웃’, 즉 모두에게 출구가 없다는 제목으로 표현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국호가 조두순을 연상케 하면서 ‘노 웨이 아웃’은 공개 전부터 화제가 됐다. 드라마는 김국호가 만기 출소하며 사회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김국호가 교도소를 나올 때부터 집에 돌아가고, 사람들이 그의 집 앞에서 동네를 떠나라고 시위하는 것까지, 조두순의 출소 때와 같은 장면이 재현된다.

이에 대해 유재명은 “조두순을 모티브 삼은 건 아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그런 범죄자와 같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내 이웃에 범죄자가 살면 안 된다고 반대하는 집회도 일어나는 세상이라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라며 “작품을 통해 사적제재와 같은 사회적 의제와 구조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에 하나의 질문이나마 던질 수 있다면 충분한 보람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유재명은 좋은 작품에서 자신을 원한다면 지독한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는 14일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나라'에선 배후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전상두(위)를, 드라마 '노 웨이 아웃'에선 생존에 목숨 건 희대의 흉악범 김국호를 맡아 열연했다. NEW 스튜디오 X+U 제공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없다곤 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것들이 많았다. 올해 공개된 작품들만 봐도 그렇다. 드라마 ‘삼식이 삼촌’ ‘노 웨이 아웃’뿐 아니라 공개를 앞둔 영화 ‘행복의 나라’와 ‘하얼빈’까지. 당 시대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시청자 또는 관객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상기시키는 작품들이다. 여기서 유재명은 손가락질당하는 악역부터 기회주의자, 그리고 독립운동가까지, 배역들을 제한 없이 맡았다.

특히 ‘삼식이 삼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였다. 그는 ‘삼식이 삼촌’에서 기회주의자 장두식을 연기했다. 유재명은 “너무 출연하고 싶었지만 일정상 어려울 것 같아 고사했는데, 송강호 선배와 제작진이 직접 출연을 요청해와서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촬영했던 작품”이라며 “‘삼식이 삼촌’은 정말 좋은 드라마였다. 1950~60년대 혼돈의 시대를, 훌륭한 배우들을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대한민국 드라마 사(史)에서 정말 멋진 작품 하나가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유재명은 안정적인 직장과 삶을 위해 부산대 생명시스템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진학 후 연극에 눈을 떴다. 20살에 시작한 연극 무대에서 20여 년을 보낸 그는 무대를 영상으로 옮겨와서도 워커홀릭으로 살고 있다. 유재명은 “대학에서 연극이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눈을 떠보니 지금 이 나이가 됐다. 쉬지 않고 무대를 만들고 쓰러트리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술 먹고 깨고 하며 작품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며 “후회보단 정신없이 살아서 좀 어지러울 정도다. 어쩌다 내가 이 길로 왔을까 싶지만, 운명인 것 같다”고 웃었다.

일만 보고 살아온 그에게 2019년엔 또 하나의 운명이 찾아왔다. 마흔이 한참 넘어 찾아온 아들이다. 아들은 그가 달려오던 삶의 방향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몸이 체력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달했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것도 영향이 있었다. 유재명은 “요즘 제 키워드는 가족과 일, 그리고 내 삶의 균형을 조화롭게 맞추는 거다. 오십을 넘은 한 남자의 삶의 고민이지 않을까”라며 “뜨거운 청춘을 보냈으니 지금은 평화롭고 담백한 시간을 꿈꾸는 것 같다. 전엔 잘하고 싶어서 힘들었다면 지금은 몸과 마음이 좀 게을러지면서 편해진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일을 좀 줄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다른 작품들을 또 촬영 중이다.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될 드라마 ‘넉 오프’ 등이 있다. 오는 14일 개봉하는 ‘행복의 나라’에선 강렬한 악역 전상두로, 올 하반기 개봉하는 ‘하얼빈’에선 독립운동가 최재형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유재명은 “전 정말 운이 좋은 배우다. 듣는 사람에 따라선 불성실한 대답이라 느낄 수도 있지만, 대학로엔 제 연배의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연기 고수들이 정말 많다”며 “저는 좀 늦게 알려졌지만 대중에게 이만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