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어떤 의료적 지원이나 몸의 치료를 위한 여러 방편을 사용해보라는 설득에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주장하며 고통당하는 건 오직 영혼뿐이라고 확신한다.”
17세기 청교도 작가이자 목회자인 리처드 백스터(1615~1691)가 자신의 책 ‘기독교 생활 지침’에 기록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징후’다. 우울증을 “병적 광기와 정신적 고통, 상상의 오류로 사리 분별이 불가능해진 질병”으로 본 백스터는 “아무도 이들을 얕보지 말라”고 한다. 우울증은 신앙에 달린 문제가 아니므로 “학력이 높든 문맹이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상관없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백스터가 글을 쓴 당시는 근대식 정신의학 치료법이 정립되기 이전이다. 지금으로부터 4세기 전 비의료인인 그가 어떻게 ‘우울증은 죄의 결과가 아닌 누구나 발병할 수 있는 질병’임을 파악했을까. 책을 공저한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와 아동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마이클 런디는 시대를 초월한 백스터의 ‘우울증 목회’에 주목했다. 백스터의 저작 중 우울증을 다룬 부분을 선별해 편집·개정한 이들은 신학자와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입장에서 본 그의 삶과 신앙, 목회적 관점을 소개했다.
1638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영국 키더민스터 지역 교회에서 사역한 백스터는 일정 기간 아마추어 의사로도 활동했다. 해당 지역에 자격을 갖춘 의사가 없어서다. 영혼뿐 아니라 몸의 아픔도 해결해야 했던 그는 아픈 성도의 증상을 세밀히 기록했다. 백스터는 이 과정에서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중병 환자를 가려냈다. 이 가운데 우울증 환자에겐 신앙 상담을 권하는 동시에 운동과 식이요법 등의 건강 지침도 제공했다.
책의 백미는 우울증 환자로 진단한 이들에게 백스터가 제공한 21가지 지침이다. 놀라운 건 여기에 현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활용하는 표준 치료법과 비슷한 내용이 꽤 있다는 것이다. 지침에는 ‘자연스레 걸린 질병의 원인은 죄가 아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다’ 등 잘못된 ‘핵심 믿음’(core belief)을 교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가족 등 주변인이 우울증 환자의 회복을 적극 도와야 한다는 안내도 있다. “백스터의 지침은 현재 우리가 ‘인지행동 치료’(CBT)라 부르는 치료법의 초기 형태에 가깝다”는 게 먼디의 평이다.
엄격한 생활 윤리로 유명한 청교도 목사인 그이지만 우울증 환자에겐 묵상과 기도 등 경건 생활의 의무를 제외했다. 대신 “통성으로 기도하고 사람들과 대면해 복된 대화 나누기에 힘쓰라”고 권고한다. 되도록 “정직하고 쾌활한 동료와 함께하라”고도 한다. 홀로 있는 시간 자체를 우울증 악화 요인으로 본 것이다. 백스터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홀로 금식할 때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 하물며 당신은 어떻겠는가.… 홀로 있는 시간은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가) 모든 걸 잃지 않으려면 반드시 피해야 한다.”
우울증 치료에 있어 약물치료를 여러 차례 강조하는 것도 이채롭다. 당시 그가 언급한 약물 중에는 수은이나 비소 등 오늘날 독약으로 평가되는 것도 있었다. 책의 감수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최관호 전주열린문교회 학원선교사는 “현재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항우울제인 ‘SSRI’는 개발된 지 수십 년이 채 되지 않았다”며 “약물적 한계 탓에 우울증 사례보다 완치 사례가 책에 적게 기록됐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잡한 약물이 때때로 효과를 나타냈다면 현대의 약리학적 처방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라는 게 저자들의 제언이다.
백스터의 조언이 현대 우울증 환자에게 다 유용한 건 아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현대 의학이 비과학적으로 치부하는 ‘4체액설’에 근거해 우울증의 원인을 설명했다. 다만 우울증 환자의 ‘영적 어려움’에 대한 목회적 지침만은 새길 부분이 적잖다. 먼디는 “‘자신의 영혼 상태를 살피고 목회자 및 의료진과 상담하라’는 백스터의 조언은 우울증 환자와 가족, 목회자와 의사의 시야를 넓혀줄 것”이라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