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6시.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유산 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는 150명이 넘는 관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관장 김미경) 관현맹인전통예술단(단장 최동익)이 선보인 ‘아리랑, 세상에 울리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관현맹인(管絃盲人) 제도는 600여년 전 시각장애인 악사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주고 궁중악사로 연주하게 했던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반영된 제도다. 관현맹인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잠시 폐지됐다가 효종이 부활시킨 후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 제도에 대한 기록과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며 잊힌 관현맹인 전통을 재현하고자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은 2011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창단했다. 예술단은 시각장애인 연주자에게 전문음악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국내외 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시각장애인의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실제로 이날 공연장을 찾은 관객은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있었다. 이들은 공연 전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상기된 듯 보였다.
장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 공연에 앞서 지난 17일 서울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진행되는 연습현장을 찾았다. 연습시간인 오후 2시가 되자 단원들은 자신의 악기를 들고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시각장애인 ‘이끔단원’ 8명과 비장애인 ‘이룸단원’ 5명으로 이뤄져있다. 시각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부터 연습실을 향해 가는 길이 매우 익숙해보였다. 방음처리된 문을 열고 연습실에 들어가자 먼저 와있던 다른 단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반갑게 인사했다.
이끔단원은 이룸단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악기 조율을 하며 연습 준비에 몰두했다. 중간중간에 오가는 대화는 오랜시간을 봐온 친구·동료의 대화처럼 크고 작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룸단원이자 타악기를 연주하는 풍원현(33)씨는 예술단에 입단하고 나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고 했다. 풍씨는 “무대에서는 모두가 같은 연주자일뿐”이라며 “연주자로서 똑같이 무대에 서는 것이지 장애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이끔단원은 청각이 발달된 경우가 많아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며 “단원끼리 (시각장애 단원이) 비장애인보다 시력이 더 좋은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할 때도 있다”고 덧붙였다.
저시력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 거문고 연주자 김수희(53)씨는 “저희의 무대를 통해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세상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아리랑이 만들어낸 하모니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공연 중간에 이끔단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순서를 준비했다. 아리랑 공연을 준비하면서 느낀 소감과 음악을 연주하며 들었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시간이다.
김씨는 이날 공연에 발표자로 나섰다. 그는 “누구나 나만의 아리랑이 있지 않나 싶다. 저의 아리랑은 제3의 고백과 같은 ‘은혜’라는 찬양”이라며 “기쁠 때는 은혜가 두 배가 되고 힘들 때에는 감사함을 되찾으며 평화를 누리게 해주는 노래”라고 전했다. 이어 “공연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아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다채로운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시간”이라며 “우리 민족은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래했다”며 “우리의 삶도 아리랑과 같길 바란다. 어려움 속에서도 단단하게 뿌리 내리는 삶을 살아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2시간 동안 진행된 공연에서는 16곡의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편곡을 거쳐 재탄생한 아리랑은 예술단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삶과 희망의 노래와도 같았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장벽을 허물고 모두가 음악 앞에서는 동일한 예술가와 같다는 메시지였다.
장재효 예술감독은 “관현맹인은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파트별로 나눠 곡 자체를 외워야 합주가 가능하다”며 “구성원이 무조건적인 도움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해야 완성도 높은 앙상블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은 13명의 단원과 장 감독이 세상 모든 사람의 아리랑을 생각하며 준비한 공연이기도 하다. 장 감독은 “아리랑은 노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음악 그 자체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사람의 생활에 가까이 있으면서 개인의 인생사와도 엮여 있고 국가와 사회의 역사적 순간에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전통음악가로 살아가는 특별한 예술가들이 아리랑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이 오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