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 해도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나 역경이 닥쳐도 기쁨의 대상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를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통과하셨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영어성경은 이 기쁨을 ‘조이(joy)’로 표현했습니다. 조이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 너무 기쁜 나머지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기쁨을 의미하는 ‘딜라이트(delight)’보다 더 강렬하고 지속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대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밧모섬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셨던 비전, 구원받은 사람이 온 열방 가운데서 나와 보좌에 계신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사 죽음의 권세를 이김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기쁨은 헌신하게 하는 힘이 있고 역경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신과 시간을 가져가는 기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어떤 종류의 기쁨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은 우리의 시간과 헌신을 헛수고로 끝낼 뿐만 아니라 인생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기쁨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일시적인 기쁨, 또는 죄악이 주는 쾌락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일시적 기쁨에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가져오는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세상의 성공, 종교적 경건 또한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약속하기에 많은 사람이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의지로 죄를 이기는 만큼 자신의 의가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는 “의지로 죄를 이기는 것은 사실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세상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이고 거짓된 기쁨을 이기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보다 훨씬 본질적이며 영원한 기쁨이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주님과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는 안정된 신분보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잠시 잠깐 누리고 사라질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영원히 지속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큰 기쁨으로 본향을 찾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시 4:7, 고후 12:10)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기쁨,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 기쁨이 우리가 죄와 유혹으로 가득한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고 세상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닌 본향을 찾는 자가 되게 하심을 믿습니다.
유승찬 수원 엔하이교회 목사
◇엔하이교회는 경기도 수원 삼성디지털시티에 있는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소속 교회입니다. 유승찬·이태화 목사 부부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선교사로 사역했고 현재 열방을 향한 선교적 교회를 꿈꾸며 사역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