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현실에 맞는 입법을 촉구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국회는 여전히 뒷짐을 쥐고 있다. ‘36주 만삭 낙태’ 영상 논란을 계기로 입법 공백 문제가 재점화된 이후에도 여야는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여성계 등 찬반 양쪽의 비판을 의식해 눈치만 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2대 국회 개원 이후 제출된 낙태죄 관련 법안 제·개정안은 ‘0건’이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낙태에 대한 처벌 규정인 형법 269조와 270조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에 2020년 말까지 관련 법을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여성의 임신과 관련된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면서도 태아의 생명권 보호도 필요한 만큼 현실에 맞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이에 법무부는 2020년 11월 의학적으로 인정된 경우에는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여성을 사회·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할 우려가 있으면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에서 한 차례 논의된 것을 끝으로 21대 국회 회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당시 논의에 참여했던 한 여당 의원은 “낙태 허용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놓고 의료계와 종교계 등 각계 이견이 크다 보니 결론을 못 냈다”고 설명했다.
낙태 관련 입법 공백은 최근 한 여성이 유튜브에서 ‘임신 36주 차에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18일 낙태죄 입법 공백을 언급하며 “여야가 입법 개선에 앞장섰으면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야 모두 소극적인 모습이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한 해 낙태 건수가 3만명 이상으로 출생아 수의 10%를 넘기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면서도 “지금 같이 국회가 ‘전쟁터’인 상황에서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여당 소속 한 법사위원도 “헌재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만큼 입법 공백 상태를 방치할 수는 없다”며 “사회적인 공감대가 필요한 문제인 만큼 토론회나 공청회 등을 충분히 거쳐 입법 보완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인 출신의 야당 중진 의원은 “정부가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 개정안을 내면 그에 대해 논의해볼 수는 있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안건이 나와야 찬반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선 박장군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