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은 자신과 싸우는 종목, 모든 걸 쏟아내는 게 중요”

입력 2024-07-22 13:01
한국 양궁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기보배가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올해 은퇴를 선언한 기보배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해설위원으로 나선다. 이한형 기자

2016 리우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동메달 결정전 5세트. 세트 점수 4-4 동점에 경기 종료까지 남은 화살은 3발. 모두가 활 끝만 바라보는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르고 기보배(36)는 10점을 연달아 명중시키며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직전 4세트에서 3점을 쏴 위기를 맞았지만 활시위를 놓는 데 흔들림은 없었다. 기보배는 “내가 쏜 화살과 10점 과녁이 실타래로 이어진 것처럼 느껴졌다”며 “선수 시절 최고의 한 발”이라고 돌아봤다.

금메달 94개, 은메달 50개, 동메달 43개. 기보배는 선수로 지낸 27년간 무려 187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은 물론이고 세계선수권대회, 세계양궁월드컵, 아시안게임, 국내 경기 등 웬만한 무대는 다 겪어본 그에게도 올림픽은 여전히 설레는 무대다. 올해 은퇴를 선언한 기보배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선 활 대신 마이크를 잡는다. 지난 2020 도쿄올림픽 때도 해설위원을 맡아보긴 했지만 당시 코로나19 여파로 출입이 제한돼 현지 해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올림픽에선 한국의 대표 효자종목인 양궁에 거는 기대가 유독 크다. 선수단 규모가 줄어든 탓에 양궁이 아니면 금메달이 보장된 종목이 많지 않아서다. 어깨가 무거운 후배 궁사들을 향해 “10연패, 3연패와 같은 숫자에 얽매이지 않고 준비한 걸 다 보여주고 왔으면 좋겠다”는 기보배를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전국 대회 ‘꼴찌’가 태극마크 달기까지

“어렸을 때 잘하는 선수들 보면 떡잎부터 다르다고 하잖아요. 근데 저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국대회 ‘꼴찌’나 다름없는 실력의 선수였어요.”

국가대표 에이스로 통했던 기보배에게도 ‘올챙이 시절’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활을 잡은 후 몇 년간 입상 한 번 못 해봤다. 그래도 오기로 활을 놓지는 않았다. 바로 위 선배들을 어깨너머로 보고 연구하면서 “양궁이 무엇인지” 몸으로 익혔다. 훈련량이 쌓이는 만큼 기량도 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만에 소년체전 3관왕을 차지한 기보배는 이후 세계 주니어 대회 국가대표 발탁 기회까지 얻으며 단숨에 유망주로 떠올랐다.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선수 경력엔 잊을 만하면 슬럼프가 찾아왔다. 기보배는 “하필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고3 때 다시 슬럼프가 찾아왔다”며 “그전까지 좋은 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하더니 슬럼프가 오자 과거 스카우트 제의도 모두 사라지더라”고 돌아봤다.

어려운 상황에도 손 내밀어준 유일한 팀 광주여자대학교에서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기보배는 다시 제 흐름을 찾아가며 슬럼프를 극복했다. 기보배는 “선수마다 제각기 다르겠지만 슬럼프에 원인이 있는 건 확실하다”며 “예를 들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 빵점을 쏜다거나 하면 작은 트라우마가 된다. 일단 거기에 파고들지 않고 슬럼프라는 걸 인정한 뒤에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슬럼프는 태극마크를 달고 나서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2012 런던올림픽 2관왕으로 금의환향한 뒤 2014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기보배는 “자만했다”는 한 마디로 그 시절을 설명했다.

“런던올림픽을 다녀오고 나니까 그 전에 어떻게 선발전을 준비했는지 잊어버린 거예요. 남들보다 더 많은 화살을 쏘고 훈련량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죠. 선발전에서 떨어지자마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어요. 양궁 국가대표가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 그제야 와닿았죠.”

다시 마음을 다잡은 후에는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기보배는 “국내 시합에선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자’고 생각하며 그해를 보냈다”며 “올림픽에 나가려고 준비할 때는 2년 반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운동을 했다”고 회상했다.

리우올림픽을 앞두고는 하루에 400~500발씩 쏘며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다. 기보배는 “기술적인 면에서 흐트러짐이 올 때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내 걸로 만들겠다는 오기가 생겼다”며 “내 한계점이 어딘지 찾기 위해 양으로 승부를 봤다”고 말했다. “쉬고 있을 때도 항상 양궁 생각뿐일 정도로 긴장감이 엄청났다”고 돌아본 기보배는 그렇게 온 힘을 다한 끝에 리우올림픽에서 여자 단체전 8연패와 개인전 동메달을 손에 넣고 돌아왔다.

선수 생활 내내 슬럼프와 극복을 거듭해온 만큼 기보배가 좋은 양궁 선수의 자질로 꼽는 건 성실함과 겸손함이다. 기보배는 “양궁은 쏘고, 뽑고, 와서 다시 쏘는 일의 반복”이라며 “그래서 자신과 싸움이고 꾸준히 해야 하는 종목”이라고 짚었다. 이어 “올해 떠오른 에이스라고 해서 다음 해 메이저 대회 대표로 선발되리란 보장이 없다”며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걸 쏟아라…후회하지 않을 땀


이제는 활을 내려놓았지만 선수 시절 선수촌에서 훈련할 때 벽면에 걸린 달력의 글귀는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기보배는 “훈련장 달력 한 귀퉁이에 ‘내 안의 모든 걸 쏟아라, 후회하지 않을 땀’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는데 그게 참 와닿았다”며 “당시엔 항상 그 글귀를 생각하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쏟아내자’는 마인드로 훈련하곤 했다”고 말했다.

혹독한 훈련 과정을 알기에 이번에 나서는 후배 궁사들이 그저 안쓰럽고 대견하다. 특히 나이 많은 선수들이 눈에 밟힌다. 기보배는 “김우진, 전훈영 선수는 나이 서른을 넘어 올림픽을 가는데 나 역시 리우에 갔을 때 29살이었다”며 “성실함 면에서는 닮은 구석이 있어 더 마음이 간다”고 밝혔다. 이어 “에이스 임시현은 두말할 것 없고, 김제덕은 마인드가 워낙 긍정적이라 이번에도 잘할 거 같다”며 후배들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렸다.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 자리를 유지하는 비결로는 ‘좋은 롤모델’을 꼽았다. 기보배는 그간의 뛰어난 성적이 “롤모델이 있기에 가능했다”며 “양궁의 경우 이미 앞길을 잘 닦아 놓은 선배들이 있어서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 단체전 10연패, 남자 단체전 3연패 등 이번 대회에 걸린 각종 기록 역시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기보배는 “선수들이 그 부담스러운 상황을 잘 극복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스러울 것 같다”며 “수식어에 얽매이지 말고 후회 없이 다 보여주고 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해설위원으로서는 한국인 지도자들과 그들이 이끄는 선수단을 최대한 분석해 갈 예정이다. 기보배는 “프랑스의 오선택 감독님이나 인도의 백용기 감독님은 대표팀에서 같이 호흡을 맞췄던 지도자들이라 더 자세히 파악해야 할 것 같다”며 “인도는 월드컵에서 한국을 이기고 우승했던 전력도 있고 프랑스도 최근까지 남녀 모두 결승전까지 올라와 무시할 수 없다”며 경계했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