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가 최근 미국 드루대에서 입수한 사진엔 늠름한 한 백인 남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촬영 연도는 1915년. 드루대 기록 보관 담당자가 사진과 함께 보내온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이 남자가 드루대 동문이라는 사실은 1867~1925년 드루대 동문 기록문서 446쪽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우리 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 제출한 논문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헨리 닷지 아펜젤러(1889~1953)다. 한국교회에서 자주 호명되는 선교사 중 한 명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다. 닷지 아펜젤러는 거하드 아펜젤러의 아들로 한국교회에서는 얼마쯤 잊힌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올해와 내년 한국교회 안팎에서는 한국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잇달아 열리지만 그의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인을 향한 사랑만큼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던 인물이다. 낯선 한국 땅에서 교육 선교에 매진하면서 소외된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선교사였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삶을 살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버지를 빼앗아간 나라, 그곳으로 온 청년
닷지 아펜젤러의 고향은 한국이다. 1889년 11월 6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한 외국인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밟았고 1900년 안식년을 맞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갔는데, 아버지는 1년 뒤 장남인 닷지 아펜젤러를 비롯한 가족들을 남겨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닷지 아펜젤러는 1902년 선박 사고로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열세 살이던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는 불문가지다. 어머니는 선박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보상금을 받았지만 4남매를 키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닷지 아펜젤러는 신문 배달을 하고 방학 때는 삼촌의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11년 프린스턴대를, 4년 뒤엔 드루대를 졸업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무슨 이유에서 다시 한국행을 택했느냐는 점이다. 왜 그는 아버지를 빼앗아간, 무자비한 절망과 슬픔을 안겨준 나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
서영석 협성대 교수의 논문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활동과 사상’에 따르면 그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겠노라고 다짐한 날짜는 1911년 8월 13일이다. 당시 그는 특별한 신앙 체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논문엔 ‘아펜젤러와 한국 Ⅱ’라는 책에 실린 닷지 아펜젤러의 고백이 인용돼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내뱉었습니다. 금세 암흑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와 영광이 일어나 말할 수 없이 행복했습니다. …나는 그때 첫 기쁨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분을 위해 영원히 일한다는 결심을 한 다음엔 그러기 위해 내가 보기에 가장 어렵고 필요한 곳, 즉 한국에 가 살면서 일하는 것이 옳은 일임이 자명해졌습니다.”
20대 시절 닷지 아펜젤러의 투철한 신앙관은 국민일보가 드루대에서 받은 그의 졸업 논문 ‘성과 종교 교육(Sex and Religious Education)’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성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이 끔찍하게 여겨진다”며 “목회자는 이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적었다.
교육 문제에 관한 이 같은 관심 때문인지 닷지 아펜젤러는 1917년 한국에 파송된 뒤에도 주로 교육 선교에 매진했다. 활동의 무대가 됐던 곳은 ‘아버지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배재학당이었다.
‘아들 아펜젤러’의 한국 사랑
닷지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21년부터다. 1월에 영어 교사로 이 학교에 들어와 그해 5월 교장에 취임했다. 교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전도 집회와 부흥회를 여는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제의 정책 탓에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성경 교육 과정을 꾸준히 유지하며 기독 인재 양성에 매진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미·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일본이 미국 선교사 추방 결정을 내리면서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가 한국을 떠나 둥지를 튼 곳은 미국 본토가 아니었다. 한반도와 가까운 미국 땅, 바로 하와이였다.
하와이에서 그는 호놀룰루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면서 한인들을 섬겼다. 배재대가 펴낸 ‘아펜젤러와 한국: 개화에 이바지한 부자 목사 이야기’에는 닷지 아펜젤러가 호놀룰루 현지 라디오 방송에서 드린 기도문이 나온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있는 당신 자녀들의 목소리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에게 우리 기도를 올립니다. …찬란한 삼천리강산이 기뻐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닷지 아펜젤러의 활약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김규식과 여운형을 축으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이 모색되던 시기, 두 집단 사이에 회합이 있을 땐 미 군정 관계자가 참석하곤 했는데 당시 그런 인물 중 하나가 닷지 아펜젤러였다. 최청순 배재대 아펜젤러연구소 연구원은 ‘헨리 닷지 아펜젤러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논문에서 닷지 아펜젤러의 그즈음 모습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인이 자신들의 정부를 민주주의식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연구원은 “(닷지 아펜젤러는) 미국의 이익이 되는 입장이 아닌 한국의 이익이 되는 입장에 있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런 평가를 덧붙인다. 닷지 아펜젤러는 아버지의 그늘 때문에 그 위상이 저평가돼 있다고, 닷지 아펜젤러보다 기여도가 비슷하거나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선교사는 호머 헐버트(1863~1949) 정도밖에 없다고, 그는 20세기 중반 한국인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묻히다
닷지 아펜젤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다시 한국을 찾는다. 구호 활동을 전개하는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Korean Church World Service) 책임자로 임명돼 주로 부산에서 피란민을 섬겼다. 하지만 고된 사역 탓인지 결국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백혈구 부족으로 병상 신세를 지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 1953년 12월 1일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기독신문 1953년 12월 7일자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한국 땅에 묻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했는지 조선 사람들이 알게 해주십시오.”
그의 뜻대로 닷지 아펜젤러는 한국 땅에 묻혔다. 장소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지난 10일 양화진을 방문했을 때 닷지 아펜젤러의 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아펜젤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그의 가묘(假墓) 등이 있는 이른바 ‘아펜젤러 묘역’에 닷지 아펜젤러의 묘소도 꾸며져 있었다. 그의 비석에 음각으로 새겨진 것은 신명기 33장 27절이었다.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닷지 아펜젤러의 삶을 안다면 누구나 묘한 감동을 느낄 말씀일 것 같았다.
글·사진=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