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국립현대미술관 마당에 의자를 허하라

입력 2024-07-18 00:37 수정 2024-07-18 00:37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 파라솔과 의자를 두면 좋을 텐데….”

신문사 여자 후배가 미술 담당 기자인 내게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땐 대규모 설치 작품을 둘 때가 있어 비워 둔 걸 거라고 ‘대변인’처럼 해명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후배 말이 맞았다. 땡볕이 내리쬐는 잔디마당은 늘 비어 있다. 그곳을 작품 설치 장소로 쓰던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은 2017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일부 작가가 더러 사용하긴 했다. 8월말에도 미디어 아트 듀오 ‘김치앤칩스’의 작품이 열흘간 설치된다. 그럴 땐 파라솔과 의자를 잠시 치우면 될 일이다. 1년에 한 번 사용하는 경우를 대비해 마냥 놀려두기에는 아주 아깝다.

미술관 내부에 쉴 곳이 없는 건 아니다. 유료 카페가 있고 로비에 벤치가 있다. 어느 곳이든 유리문 밖으로 외부를 바라봐야 하는 내부다. 후배 말대로 ‘가족 단위로 왔을 때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하거나 놀 수 있는 곳’은 야외만 가능하다.

야외 쉼터의 이점은 또 있다. 햇빛과 바람을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근대 문화유산인 서울관의 건축물 그 자체를 바라보며 오감으로 감각할 수 있다. 서울관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 경성의전 부속병원으로 건축됐다. 한국인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설계한 모더니즘 건축물 1호라 역사적 가치가 있다. ‘수평 띠 창’은 근대건축의 5원칙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2013년 서울관 출범 이후 진행된 미술관 행정을 보면 전시 기획에만 치중, 건축물의 역사성과 아름다움은 간과하는 거 같다.

새삼 ‘미술관 잔디마당에 의자를 허(許)하라’고 주장하고 싶다. ‘미술관은 누구를 위한 곳인가’라는 거대한 질문과 철학이 파라솔과 의자에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걸린 종교화처럼 미술은 원래 공동체를 위해 복무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이 대세가 되면서 미술은 돈을 찾아 떠도는 상품이 됐다. 미술관은 미술 작품이 신앙처럼 모셔지는 공간이 됐다. 지금까지 미술관은 작품(작가)만을 위한 공간이지 않았나, 관람객은 기관의 성과 지표를 재는 수치로만 여겨지지 않았나 묻게 된다. 그래서 전시장 안에는 관람객이 ‘쉬는’ 의자가 없는 것이 아닌가. 미술관에서 의자(벤치)는 늘 전시장 밖에 있다. 안에는 관람객을 ‘지키는’ 지킴이용 의자가 있을 뿐이다. 있다 치더라도 영상 작품 앞에 연필과 지우개의 공식처럼 작품 관람을 위해 딸려 있을 뿐이다.

2022년 개최된 독일 카셀도큐멘타는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 중요한 전시였다. 각종 비엔날레가 에코페미니즘 등 동어반복적 주제를 되풀이할 때 총감독을 맡은 인도네시아 작가그룹 '루앙루파’는 미술관 제도와 철학에 균열을 내는 파격적 질문들을 던졌다. ‘미술관의 주인은 누구인가’도 그중 하나. 카셀에서는 관람객도 작가와 나란히 미술관의 주인이 됐다. 전시장 안팎 곳곳에 의자와 카펫이 있었다. 전시장 안에 심지어 어린이 놀이터와 청소년용 스케이드보드장이 있었다. 그라피티 예술이 그려진 바닥 위에서 신나게 보드를 타는 청소년들을 보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이 좋은 전시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미래의 미술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파장을 일으켜야 한다. 야외에 놓일 의자가 일으킬 파장이 궁금하다면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보라. 의자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덕분에 광장의 사전적 의미가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만든 넓은 빈터’에서 ‘사람들이 모여 오래 머물고 싶은 쉼터’로 바뀌는 기분이 든다. 미술관도 오래 머물며 쉬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