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은 ‘기업 밸류업’의 핵심으로 거론된다. 현행 상법 제382조의 3은 ‘이사는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액주주들은 이를 ‘회사 및 주주를 위해’로 고쳐야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증시 개장일인 1월 2일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상법 개정 역시 추진할 것”이라며 이에 화답했다.
지난달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은 명확하다”며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만 해도 정부는 법 개정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정부 태도를 보면 이 건은 어딘가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상법의 소관 부처인 법무부는 시종일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이달 초 발표한 ‘역동경제 로드맵’에도 상법 개정은 포함되지 않았다. 기재부는 취약한 기업 지배구조 탓에 증시 저평가가 지속된다고 평가했지만 대책으로는 이사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개인적 이익을 얻는 것을 방지하는 ‘기회 유용 금지’를 강화하는 안 정도만 내놨다. 지난달 27일 정부가 발의한 상법 개정안에도 전자 주주총회 도입 등의 내용만 담겨 있다.
정부의 스탠스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은 금융위원장 후보자인 김병환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의 발언이다. 그는 이달 초 역동경제 로드맵 사전브리핑에서 “이사의 충실 의무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과 관련해선 공론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시점에는 정부 입장을 정하지 않겠나 싶다”고 밝혔다. 공론화 과정이 끝나고 실행 단계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주 금융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추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을 정부가 유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부가 머뭇거리는 배경에는 재계의 강력한 반발이 있다. 재계는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는 신속한 경영 판단을 막아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또 기업이 소송 리스크에 시달리면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주주 보호와 대주주 견제, 이사 책임을 묻기 위한 다양한 규정들이 이미 마련돼 있다는 것도 재계 주장이다.
이를 소액주주 단체의 의견과 비교하면 소액주주 쪽이 더 광범위한 설득력을 지닌다. 한국 기업의 이사회는 일반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는 판단을 서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과거 여러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합병 비율로 소액주주가 피해를 봤다. 이들의 말대로 이사들이 주주의 이익을 고려해 판단을 내리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대통령까지 이에 동의해 정책 방향을 제시한 마당에 공론화가 더 필요한지 의문이다. 서로의 입장이 뚜렷하므로 재계와 소액주주가 다투는 것은 시간 낭비일 수 있다. 남은 건 정부의 선택과 실천인데 지금 소액주주를 달래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를 없던 일로 돌리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올해 내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며 분위기를 고조시켜 놓고 주주 가치를 끌어올릴 핵심 정책을 폐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을 단계적으로 하든 다른 당근을 제시하든 법 개정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부가 재계를 설득해야 한다.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를 모든 기업에 적용하기 어렵다면 상장사로 제한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금감원장이 언급한 배임죄 폐지도 논의 테이블에 올려볼 수 있다.
권기석 경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