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말할 수 있어야 생명을 지킬 수 있다”

입력 2024-07-16 03:06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15일 부산 수영구의 복합문화공간 엘레브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순회 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어둠을 나눌 수 있어야 빛을 발견합니다. 슬픔을 말할 수 있어야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15시간을 날아온 정신의학과 전문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은 이들을 안아주듯 이렇게 말했다. 나종호 미 예일대 의대 교수는 15일 부산 수영구의 복합문화공간 엘레브에서 진행된 자살 유가족 인식 개선을 위한 지역순회 포럼의 강연자로 나섰다. 지난해 7월 같은 행사에서 유가족들을 만난 지 1년 만이다.

순회 포럼은 생명문화 라이프호프(대표 조성돈 교수)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사장 황태연), 자살 유가족 전국모임 미고사(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가 유가족의 일상 회복을 돕고 편견으로 인한 고통 경감을 위해 지난해부터 ‘자살, 말할 수 있는 죽음’을 주제로 마련했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기(자살 유족들을 위한 대화)’를 주제로 강단에 오른 나 교수는 레지던트 시절 친구를 자살로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을 공유하며 유가족으로서 ‘내가 그의 자살을 왜 막지 못했을까’라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그는 “다른 유가족과의 대화, 긍정적 감정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 참여, 종교적 모임 등이 애도 후 회복을 돕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라이프호프를 중심으로 자살 유가족과 함께하는 공개 모임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세 차례 진행됐던 순회 포럼은 올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대전, 전주, 부산까지 다섯 차례 진행된다. 나 교수는 유가족을 위한, 유가족에 의한 모임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 자살률 감축은 물론 건강성 회복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스테디셀러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아몬드)의 저자이기도 한 나 교수는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일상 속 ‘생명 지킴이’가 돼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사람 도서관’을 구현한 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을 흘려 보내주신 예수님”이라며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비단 자살 유가족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울고 아픔을 나누는 게 당연하다”고 전했다. 나 교수는 강연에 이어 자살 유가족과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에도 참여하며 자신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치유와 회복의 길로 용기 있게 나서는 이들을 응원했다.

국내에선 자살예방법 시행령을 통해 지난 12일부터 지방자치단체와 초·중·고등학교, 사회복지시설 등을 대상으로 연 1회 자살 예방 교육이 의무화됐지만 벌써 교육 대상자 축소와 온라인 교육 대체로 인한 효과 감소 등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나 교수는 “과거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집행한 예산과 비교해도 자살 예방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한국 사회가 자살과 유가족에 대한 구조적 낙인을 떨쳐 내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현장에서는 자살 유가족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과 지원 시스템 확보를 위한 서명운동도 진행됐다.

부산=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