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먹사니즘

입력 2024-07-12 00:40

‘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라는 뜻의 조어 ‘먹고사니즘’은 2000년대부터 쓰여졌다. 외환위기 이후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현실을 반영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먹는 것을 앞세우는 건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고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라는 예수의 말씀도 지식인들이 곧잘 인용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진보 진영은 먹고사니즘을 정의, 민주 등의 가치는 외면하고 천박한 욕망을 좇는 현상이라 봤다. 2007년 경제인 출신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진보의 먹고사니즘 비판이 본격화했다. 대표적인 이가 조국 전 서울대 교수(조국혁신당 의원)다.

조 의원은 2010년대 초 각종 저서에서 “사회가 ‘먹고사니즘’이라는 한국 특유의 보수주의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먹고사니즘=배금주의’라고 비판했고 “주권자가 먹고사니즘에 빠져 있다면 국민은 영원히 삼성왕국의 신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가족의 ‘먹고사니즘’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음이 후일 드러났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먹고사니즘에 중독된 어른들에 의해 젊은이들은 스펙에 갇히고 정해진 길로 내몰린다”(‘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고 했다.

최근 들어서야 진보의 시각이 바뀌고 있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서 박용진 후보는 “내 철학은 먹고사니즘”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는 지난 10일 대표직 연임 도전을 선언하며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먹사니즘’이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먹고사니즘’을 ‘먹사니즘’으로 줄여 쓴 게 이채롭다. 자신의 브랜드로 만들 속셈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념보다 민생에 초점을 두는 자세는 보기 좋다. 다만 먹사니즘을 외치면서 입법 무대인 국회를 탄핵과 정쟁의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국민의 먹사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국회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는 ‘여의도 대통령’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