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메디컬 드라마 중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품을 꼽자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빠지지 않는다. 각자 다른 성향을 지닌 주인공 의사 5명이 등장한다. 대한민국 흉부외과 최고 권위자였던 주석중 교수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드라마 속 2명이 선명하게 겹친다. 곰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양석형(김대명 분)과 실력이 출중하지만 후배와 학계를 먼저 생각하는 채송화(전미도 분)이다. 이들을 절반씩 섞은 의사가 실존한다면 주 교수의 모습이겠다 싶다.
책 추천사를 남긴 여러 사람 중엔 이 드라마를 쓴 이우정 작가가 있다. 생과 사가 갈리는, 말 그대로 생명의 최전선에 선 흉부외과에 대한 존경을 드러낸 이 작가는 “그가 이뤄낸 지금의 성과는 셀 수 없이 많은 노력과 희생의 시간으로 개인의 삶은 사라진 채 오직 환자만을 위한 헌신의 시간으로 인해 가능했던 일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주 교수는 지난해 6월 자전거를 타고 서울아산병원으로 출근하다가 교차로 건널목에서 덤프트럭에 부딪혀 사망했다. 그가 별세한 지 1년여 만에 출간된 이 책을 통해 그의 삶과 신앙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기회를 얻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국내 대동맥 질환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지만 그는 수술 전 늘 “저는 당신의 뜻에 따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하찮은 도구, 일회용 도구와 같다”고 두 손을 모았다. 생전 그와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던 배우 조인성이 책 출간에 흔쾌히 추천사를 쓴 것도 삶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에서 오는 감동 덕분이다. 그는 “교수님을 통해 삶과 사람을 마주하는 마음가짐을 배우게 된다.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고 했다.
주 교수는 누군가의 생사를 놓고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할 때 수없이 기도문을 썼다. 주기도문에 이어 자주 남긴 기도는 이른바 ‘평온을 위한 기도’였다. “아버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내가 바꿔야 할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그는 ‘주는 기쁨’을 누릴 줄 알았다. 흉부외과에 남긴 업적이 그랬고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응급 호출을 받은 것도 그렇다. 특히 첫째 아들 대학 졸업식 참석차 간 미국 뉴욕에서, 집 앞에서 만난 노숙인에게 기꺼이 식사를 대접한 일화는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또 그에 대한 감사를 나눔으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기독교적 가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주 교수의 기도문에는 그가 상상한 천국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평화를 누리며 새로운 지식을 얻고 배우는 것을 기뻐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물고기와 처음 보는 다양한 야생 생물이 가득한 개울을 따라 흐르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꿈의 도서관에서 연구하고 읽고 모든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채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에게도 천국의 위로가 전해지는 책이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