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윤여표 (6) 식품의약품안전청장 맡아 국민에게 ‘섬김과 봉사’ 실천

입력 2024-07-10 03:05
윤여표 전 충북대 총장이 2008년 제9대 식품의약품안전청장 취임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전 총장 제공

나는 1986년 서울대 대학원 약학 박사 학위를 받고 충북대 교수로 부임했다. 조교수를 시작으로 90년부터 95년은 부교수로 지냈다. 95년이 돼서야 정교수가 됐다.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10년 동안 서울 정동 채플(교회)에서 김준곤 목사님에게서 양육을 받았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했던 기억을 가지고 교수직에 올랐다. 교수로 임직하고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담당 교수로 학생들과 소통했다.

교직에 전념하던 가운데 2008년 3월 제9대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청 청장이란 직분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다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순종하겠다는 일념으로 식약청장을 지내기로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식약청장직은 참 쉽지 않은 자리였음을 고백한다.

1998년 창설된 식약청은 11년이 지나는 동안 청장이 9명이 나왔었다. 이들의 평균 재직 기간은 1년 2~3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큰 사건 사고가 터지면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공업용 우지 라면 파동’(1989년)을 비롯해 ‘고름 우유’(1995년) ‘불량 고춧가루’(2002년) ‘불량 만두’(2004년) 등의 사유로 말이다.

그런데 나의 식약청장 재임 시절 앞선 이들보다 더 큰 사건이 터졌다. 2008년 ‘멜라민 파동’이었다. 중국에서 일어난 식품 사고였다. 식품업자들이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정부의 성분 검사를 피하면서 영아들이 섭취하는 분유나 기타 유제품에 멜라민을 섞어 넣고 파는 사태였다.

당시 이를 먹은 현지 아동 8명이 사망하고 신장결석 신부전증 등으로 30만명이 병원 진료를 받는 대란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피해갈 순 없었다. 중국산 비중이 전체 수입식품의 25%(금액 기준)나 됐다. 쌀을 제외한 곡물 자급률은 28%였고 국내 가공식품 원재료의 80%가 중국산이다. 전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중국산 식품이 파고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세계화 바람은 금융이나 무역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식품 분야에도 강하게 불고 있었다. 국내 소비자들은 이제 먹거리를 못 믿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국민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기로 했다.

나는 대형 할인점과 소형 상점 등을 돌며 멜라민이 검출된 수입제품 회수 현장을 살펴보고 직접 발로 뛰었다. 임기 초 내세웠던 ‘섬김과 봉사’로 국민에게 다가가겠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국민을 위해서라면 한 번 문제가 있었거나 유해성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업체나 제품에 대해서는 100% 전수검사를 펼쳤다. 중국 현지 정보 수집 시스템을 만들고 현지 공장에 문제가 있을 경우 직접 현장을 조사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통관 단계에서부터 정밀 이화학적 검사 비율을 20%에 맞췄다. 당시 일본 10.7%, 영국 10.0%, 미국 1%였던 검사 비율을 감안하면 20%는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믿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기에 이 문제를 주님께 올려드렸다. 그리고 앞서 고백한 잠언 16장 9절 말씀과 같이 그 결과를 인정하고 따르기로 했다.

정리=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