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있다. 외식산업이 발전하고 다양한 간편 조리식품들이 출시되면서 밥을 대체할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밥솥을 아예 쓰지 않는 집도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양곡소비량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4㎏으로, 꾸준히 줄어 30년 전인 1993년(110.2㎏)의 절반 수준이다.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54.6g으로, 시중에 판매되는 즉석밥(200~210g) 1개보다도 적다.
즉석밥을 즐겨 먹는 유모(32)씨는 결혼 2년차에도 신혼집에 밥솥이 없다. 그는 “밥을 해놓고 그냥 두면 상할 수 있어 걱정되는데 즉석밥은 오히려 항상 새밥을 먹는 느낌”이라며 밥을 챙겨 먹는 데에 딱히 불편함이 없다고 전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송모(44·여)씨도 “맞벌이 때문에 집에 아이들만 있을 때가 많은데, 반찬만 해놓으면 아이들이 알아서 햇반으로 끼니를 때워 좋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즉석밥 시장은 성장하고 있다. 가성비와 편리함, 맛 모두 잡았다는 평가다. CJ제일제당에 따르면 햇반의 지난해 국내외 전체 매출은 전년보다 4.3% 늘어난 8503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즉석밥의 대명사 ‘햇반 ’의 탄생
즉석밥은 군용식으로 처음 개발됐다. 군인이 작전 중 야외에서 간편히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된 군용식은 완전 조리 밥을 밀봉 포장한 레토르트와 밥을 지어 얼린 뒤 건조시키는 ‘동결 건조미’ 방식을 채택했다.
1990년대 즉석밥 시장의 태동에는 일본 식문화 영향이 컸다. 일본은 이미 80년대 즉석밥을 최초로 출시하고 90년대에는 연 평균 14%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90년대 초반 태원식품과 천일식품이 냉동 인스턴트 밥을 내놨지만 실패했다.
문제는 갓 지은 밥맛에 한참 못 미치는 맛 때문이었다. 다른 업체들도 즉석밥 시장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냉동 또는 레토르트 밥을 내놓았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금은 즉석밥의 대명사가 된 햇반을 만든 CJ제일제당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89년 알파미(밥에서 수분을 빼 말린 것)에 뜨거운 물을 부어먹는 방식의 즉석밥을 개발했지만 맛도 식감도 잡지 못했다. 그 이후 출시된 동결 건조미 역시 알파미보다 식감은 개선됐지만 동결 과정에서 밥알이 부스러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CJ제일제당이 시행착오 끝에 찾은 방식이 바로 현재 활용되는 ‘무균 포장밥’이다. 반도체 공정 수준의 클린룸에서 살균한 포장재로 밥을 포장해 일체의 미생물이 들어갈 수 없도록 포장하는 방식이다. 일본에서 앞서 88년 무균 포장밥이 나오며 즉석밥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무균 포장밥은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으며 갓 지은 밥과 밥맛이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공법 탓에 100억원이 넘는 비용이 필요했다. 높은 초기 투자 비용에 사내에서도 반발이 심했지만 결국 투자를 결정하는 모험을 택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햇반은 97년 470만개, 그 이듬해 720만개가 팔리는 등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며 가정과 시장에 정착했다. 햇반은 96년 12월 시장에 처음 등장한 이후 28년째 줄곧 시장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2002년 농심, 2004년 오뚜기 등 경쟁사가 잇따라 무균 포장밥 시장에 뛰어들었다.
즉석밥 호황에는 시대적 흐름도 한몫했다. 1990년대는 경제 호황으로 기혼 여성의 취업률과 전자레인지의 보급률이 높아졌다. 80년 375만명이었던 취업 기혼 여성은 90년 650만명으로, 햇반 출시 직후인 97년에는 710만명까지 늘어났다. 전자레인지 보급률 또한 65%까지 올랐다. 1인 가구의 수 역시 차츰 늘었다. 85년 약 66만 가구였던 1인 가구는 90년 102만 가구, 95년 164만 가구로 10년새 2.5배 늘어났다.
곤약밥·볶음밥·퀴노아밥… 즉석밥의 진화
햇반이 성공적으로 시장에 자리잡자 후발주자들도 본격적으로 즉석밥을 내놓기 시작했다. 요즘의 즉석밥은 잡곡이나 채소, 해산물, 양념을 넣는 등 진화하고 있다.
특히 낮은 칼로리의 곤약밥과 다양한 통곡물을 활용한 ‘웰니스’ 즉석밥이 인기다. 체중 감량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저열량, 중장년층에겐 식이섬유가 풍부한 저혈당 밥이 인기를 끌고 있다.
CJ제일제당 측은 올해 ‘햇반 곤약밥’ 판매량이 2022년 9월 첫 출시 이후 누적 1000만개를 돌파했다고 지난 5월 밝혔다. 또한 잡곡밥인 ‘서리태 흑미밥’과 곤약밥 ‘렌틸콩퀴노아 곤약밥’, ‘병아리콩퀴노아 곤약밥’ 등 신제품 3종을 지난 3월 출시하며 라인업을 강화하기도 했다. 동원F&B는 ‘쎈쿡’ 등 잡곡밥 제품을 특화하며 햇반과 차별화 전략을 폈다. 농심켈로그 역시 지난해 8월 100% 통귀리로 만든 ‘통귀리밥’을 출시하며 즉석밥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시리얼 브랜드가 국내 즉석밥 시장에 진출한 건 농심켈로그가 처음이다.
다른 반찬을 곁들일 필요 없이 간편하게 한 끼 식사가 가능한 볶음밥과 비빔밥 즉석밥도 인기다. 동원F&B가 지난달 출시한 초간편 비빔밥 ‘양반 비빔드밥’ 역시 프리미엄 즉석밥 제품으로 주목받는다. 각각 용기와 파우치 형태로 출시된 ‘양반 비빔드밥’ 용기 타입 3종에는 ‘매운참치 비빔밥’ ‘불고기 비빔밥’ ‘돌솥 비빔밥’이 있다.
하림도 지난해 4월 홍콩·태국식 볶음밥을 선보이며 글로벌 시장을 공략했다. 이어 최근에는 ‘K-푸드’의 열풍에 힘입어 ‘더미식 요리밥’ 3종을 출시했다. 요리밥 3종의 테마는 ‘국내 지역의 대표 밥 요리’로 신제품 3종은 ‘황등 비빔밥’ ‘춘천 닭갈비볶음밥’ 전주 돌솥비빔밥’이다.
업계는 단순한 즉석밥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카테고리와 타깃층으로 영역을 확장할 전망이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언제 어디서든 햇반을 먹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라이프 트렌드가 됐다”며 “앞으로도 차별화된 맛품질로 진화해 소비자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