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장신대 초기 학적부, 박창환 전 학장이 구입했던 것

입력 2024-07-04 03:02

최근 장로회신학대(총장 김운용)가 총신대(총장 박성규)에 ‘1907~1959년 학적부’ 사본을 전달했다.

이로써 총신대는 비어있던 역사의 조각을 채울 수 있게 됐다. 관련 기사가 이어지면서 1901년 새뮤얼 A 모펫(마포삼열) 선교사가 세운 평양신학교에 뿌리를 둔 두 신학대 중 장신대가 학적부를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학적부가 사라졌다

1945년 광복 이후 예수교장로회는 남산에 신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가 1959년까지 이어진다. 그해 장로회는 대분열을 하고 지금의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합동 총회가 태동한다. 남산에 있던 신학교도 둘로 나뉘어 통합은 서울 동대문에, 합동은 용산에 임시 교사를 마련했다.

교단 분열은 통합과 합동 모두에 큰 혼란이었다. 남산신학교의 집기와 서류, 도서관 장서 등은 용산으로 옮겨졌다. 통합 측에는 미국 북·남장로교를 비롯한 각국 선교사가 함께했다.

분열 초기 누구에게도 학적부가 없었다. 학적부를 둘러싼 비밀이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건 박창환(1924~2020·사진) 전 장신대 학장이 남긴 미공개 회고록에서였다.

3일 국민일보 취재 결과 장신대에서 1948~1989년까지 강의했던 박 학장은 분열 후 학적부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이며 학적부를 확보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회고록에 자세히 적어 뒀다. A4 120쪽 분량의 회고록에는 박 학장이 직접 보고 경험했던 한국교회 비사가 빼곡히 담겨 있다.

“학적부 제가 갖고 있습니다”

장로회신학대에 보관돼 있는 학적부 원본의 겉표지 모습. ‘졸업생대장’이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사진은 ‘평양신학교 졸업생 명부’라고 쓰인 학적부 내지. 장신대 제공

학적부와 관련한 핵심 인물은 남산신학교의 직원이던 김모 집사. 그는 분열 후 합동 총회 신학교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 집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나와 매우 가까웠다. 여러 사정으로 그쪽에 있었다. 김 집사는 그곳을 떠나고 싶은데 직원들에게 빚을 져 청산해야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씨의 국회의원 선거를 돕다가 그가 낙선하는 바람에 빚을 졌다고 했다. 나는 갚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월급을 두 곳(신학교와 성서공회)에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며칠 후 종로 화신백화점 뒤 ‘거상(巨象)’이라는 다방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꼭 필요한 금액이 17만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제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까. 사실 신학교 학적부가 저의 집에 보관돼 있습니다’라는 게 아닌가.”

17만원은 1959년 쌀 한 가마니(80㎏) 가격이 1305원이던 걸 고려했을 때 지금 가치로 26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쌀의 가치가 지속 하락하면서 당시 체감 가치는 훨씬 컸을 것으로 보인다. 교단 분열 이후 총회와 신학교의 각종 서류를 개인이 갖고 있던 일은 비일비재했다.

박 학장은 이를 즉시 학교에 보고했지만 처음엔 구매에 적극적이던 계일승 당시 장신대 학장 등이 여러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발을 뺐다고 한다.

사재를 털어 확보한 학적부

“나는 화가 나 ‘단독으로라도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처형댁에서 월 5부 이자로 돈을 꿨다. 김 집사에게 학적부가 들어 있는 고리짝을 받고 한 달 뒤 이를 학교로 운반했다. 그렇게 해서 장로회신학교 학적부가 자기 고장으로 돌아왔다.”

박 학장이 확보한 학적부는 ‘1907~1951’ ‘1952~1959’ 두 권으로 각각 349쪽과 282쪽 분량이다. 학적부를 확보한 시기는 분열 이듬해인 1960년으로 추정된다.

임희국 장신대 명예교수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학적부를 확보한 건 장신대에는 다행이었다”면서 “한 집안의 족보와 같은 학적부인데 자칫 누구도 확보하지 못하고 소실될 뻔했다”고 말했다. 박용규 총신대 명예교수도 “학적부 사본 공유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고 앞으로도 두 대학이 더욱 활발한 교류를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