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위대한 크리스천인 클레르보의 버나드(1090∼1153)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운하 같은 사람과 저수지 같은 사람이 그것이다. 운하 같은 사람은 은혜의 샘물이 내 마음에 차오르기도 전에 그것을 그냥 밖으로 쏟아내는 사람이다. 반면에 저수지 같은 사람은 은혜를 안으로 지속해서 담아내어 때가 됐을 때 자연스럽게 차고 넘쳐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보여주고 광고하지 않으면 존재감이 없어지고, 그래서 사장되기 쉬운 문화에 사는 현대인은 단연코 운하 같은 사람에 속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의 크리스천들도 저수지 같은 성도보다 운하 같은 성도가 점점 많아진다는 점이다. 은혜가 내 발목에 좀 찼다 싶으면 기다리지 못하고 차오른 물만큼 써버려 곧 바닥을 드러낸다. 결국 받은 것보다 2~3배 이상 퍼내어 써버려 곧 영성이 바닥을 드러낸다.
어디 교인들뿐이랴. 교회도 그러하다. 공동체에 신앙의 샘물이 차고 넘쳐 그 받은 은혜의 힘이 자연스럽게 흘러 지역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교회를 부흥시키겠단 일념이든 아니면 세상을 섬기는 좋은 교회가 되겠다는 선한 동기든 내부적으로 차오르기도 전에 밖으로 뻗어나가려다가 교회 성도와 조직이 지쳐 소진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 영적 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내적 축적’을 통해 ‘외적 팽창’으로 이어진다. 안에서 군불의 열기로 데워진 물이 끓고 끓어 마침내 엄청난 열과 함께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원리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영적인 일은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이는 ‘운하 같은 삶은 너무 대기론적인 혹은 단계론적 삶의 태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일이란 것이 그렇게 단계를 밟아 진행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비록 조금은 부족할지라도 사역을 펼치면서 도전과 은혜를 받고, 그렇게 받은 은혜로 다시 사역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드문 사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하다가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받으며 지쳐 소진된 사람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보지 않는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시운이 좋아 득세(得勢)를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권좌에 오른 사람의 판단과 결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는가. 개인이든 공동체든 훈련이 절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훈련 없이 사역 없다’는 말이 진리인 이유가 이것이다. 오늘날도 일하겠다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세상을 위해 유익한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사람은 적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혼탁해져 간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 기도하면서 안으로 축적되지 않은 사람을 쓰신 경우가 있는가. 모세와 사무엘은 말할 것 없고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세례 요한도 이 영적 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셨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아 그 힘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 내적 축적 뒤의 외적 팽창이다.
필자는 세상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질문하고 싶다. “정말 그 일을 이룰 준비가 돼 있고, 훈련을 통해 그 일에 달려들고 있는가. 내적 축적이 끝나 이제 흘러넘치는 삶이 시작되었기에 나서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권면하고 싶다. 우리는 운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저수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상학 새문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