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단어와 관계

입력 2024-07-01 00:34

음악에서 ‘도’는 그냥 ‘도’지만 ‘도’ 옆에 ‘솔’이 놓이는지 ‘라’가 놓이는지에 따라 장조가 될지 단조가 될지, 어떤 감정을 지닌 멜로디가 될지 결정된다. ‘도’와 ‘솔’과 ‘라’가 각각의 독립된 음으로 들려올 때에는 단순한 소리로 느껴지지만 서로의 곁에 놓이는 방식에 따라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놀랍다. 그러니까 음악은 결국 관계인 것이다.

‘시차 노트’라는 책은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 아래에서 쓰인 산문들의 모음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가장 몰두했던 것은 단어들이 단지 서로의 옆에 있기만 해도 어떤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돌과 입맞춤’ ‘뼈와 종이’처럼 두 단어의 연쇄로 이루어진 제목을 갖고 있다. 흔히 연속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두 단어가 나란히 놓여 있을 때 단어들은 갑자기 종이 위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해진다. 아마도 연이어 놓인 단어들의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연결이 한 단어를 더욱 깊게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연결은 또다시 관계를 만든다. 새로운 관계의 생성은 관계를 이루는 주체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미시세계에서 입자들은 관측되지 않을 때 파동으로 존재한다. 물리적으로 우리는 타 존재에 의해 관측된 순간에만 입자로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사인파(sine wave)가 있다고 할 때, 이 사인파의 주파수가 커지면 ‘삐’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동일한 주파수의 위상이 다른 사인파 또한 똑같은 ‘삐’ 소리를 낸다. 이 두 개를 합성하면 침묵의 상태가 된다. 두 개의 에너지가 작동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음향적으로 침묵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최소 두 개 이상의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는 상태다. 이 기이한 현상들은 세계의 구성 원리가 관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개별 주체보다 관계를 우선시하는 사고의 방식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