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징그럽게 타고난 것은 없다

입력 2024-06-28 00:32

‘벌레 혐오감’은 불가피한 문화적 산물…
살충제 대신 공존으로 세상에 눈을 뜬다

붉은등우단털파리가 저녁 산책길에 떼를 지어 날아다닌다. 날개를 접고 있으면 작은 바퀴벌레같이 징그러운 것이 두 마리씩 꼬리를 엉켜 다니니 쉽게 정이 가지 않는다. 생김새는 징그럽지만 다행히 ‘해충’은 아니다. 털파리 유충은 도시의 습한 곳에서 썩은 식물이나 죽은 동물들 사체를 먹어치우며 생태 순환 고리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한다. 성충이 되고 나서도 ‘러브버그’라는 별명답게 ‘교미’에만 몰두하느라 인간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서 손도 대기 싫을 만큼 징그러웠던 것이 갑자기 이쁘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벌레를 싫어하는 것은 징그럽게 타고난 외양, 즉 타고난 생김새 탓이 크다. “징그러워서 징그럽다”고 말한 것뿐이다. 그러나 정말 털파리가 징그러운 것은 털파리 탓일까.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벌레를 왜 그토록 싫어하는지 간단히 언급했다. 그는 다수의 벌레가 동물의 부패한 배설물이나 사체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원시 인류가 벌레의 생태를 보며 결국 인간도 여타의 동물들처럼 죽어 썩고 말 존재임을 연상했다고 설명한다. 죽은 동물 사체에서 우글대는 벌레를 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동물적 취약성과 유한성을 떠올리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벌레 혐오감’이 의료 기술이 미비했던 시절 벌레가 옮기는 전염병으로부터 인간사회를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산물이었음도 강조한다.

즉 인간은 벌레의 타고난 외양이 징그러워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벌레는 자연의 다채로운 생태계 속에서 필요할 만큼 쓸모 있게 모양을 갖추었다. 그러니 “징그러워서 징그럽다고 말했을 뿐”이라는 말은 틀렸다. 인간 중심의 관점에 일방적으로 규정된 오래된 편견이자 과잉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지난 100여년간 농업생산성과 도시 청결을 핑계로 인류가 살충제와 해충제를 퍼부으며 벌레 일체를 모조리 말살해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됐다. 현대 인류는 이제 웬만한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당한 과학 지식과 의료 기술을 갖추었기에 벌레를 더 이상 두려워하며 피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벌레를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학기 우리 대학의 가드닝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과 함께 대형 화분의 흙을 파헤치며 수백 마리 굼벵이를 잡았다. 작물 뿌리를 갉아먹는 탓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잔인한 살생’을 통해 역설적으로 ‘생명의 신비’를 배웠다. 조별로 한 봉지씩 잡은 굼벵이를 우리는 직접 죽이기에는 왠지 모르게 두려웠다. 그래서 종이상자에 담아 텃밭 한켠에 두었는데, 사람이 모두 물러간 텃밭에서 까치가 상자를 헤집고 굼벵이를 가져갔다. 그 일을 겪은 학생들은 까치가 굼벵이로 새끼를 키웠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을 과제로 만들었다. 한 생명의 죽음을 통해 다른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책이 아니라 텃밭에서 배운 것이다.

한 학생은 할아버지가 살충제를 뿌리는 밭에서는 보지 못했던 벌레가 학교 텃밭에 넘쳐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비, 벌, 파리, 굼벵이나 풍뎅이, 진드기, 메뚜기, 사마귀, 무당벌레같이 이름이 알려진 벌레뿐만 아니라 네이버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는 기괴한 벌레를 쉽게 볼 수 있다. 살충제를 쓰지 않고 보이는 것만 손으로 직접 잡아내는 수준의 ‘게으른’ 농법이 펼쳐지는 우리 텃밭에는 인간의 손을 피한 벌레들이 자기 생명을 나름대로 끝까지 살아낸다. 우리는 벌레를 손으로 잡아 죽이는 ‘잔인한’ 농법에서도 역설적으로 벌레와 친숙해졌다. 그 친숙함은 텃밭의 열매를 벌레들에게도 양보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탐욕의 절제도 가르쳐줬다. 벌레 덕분에 우리도 생명의 순환 고리 한 자리를 다시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도 사는 세상에 눈을 뜬 것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