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떠올랐던 나라, 에디오피아. 초등학교 시절엔 참 신기했다. 어떻게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6000명 넘는 젊은이들을 보냈을까. 자라면서 알게 됐다. 솔로몬 왕조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무솔리니의 자국 침략 당시 국제연맹이 ‘집단안보’라는 보편원칙을 실행하지 않았던 역사에 회한이 무척이나 컸다는 것을.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면, 그건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라는 황제의 근위대 파병 격려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참전한 유엔회원국 16개국 중 규모도 작고 열악했지만 가장 용감히 싸웠고 각자 없는 월급 털어가며 고아원까지 지었다는 그들. 1968년 방한 당시 뜨거운 환영을 받았던 황제가 신자로서 참석한 영락교회 주일예배에서 한경직 목사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라는 우정 어린 설교를 했다.
하지만 1974년 공산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비운의 황제는 살해되고 참전용사들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행 8:32)’ 극빈층으로 전락한다. 자원 부국이던 나라는 최빈국으로 몰락한다. 그럼에도 인고의 세월 끝에 자유가 찾아온 지금 70명 남짓의 90대 생존 노병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한국은 좋은 나라입니다.” “한국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리랑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들의 자녀는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평생 인간 이하 대접을 받았지만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한국을 도운 걸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고. 그러면서도 궁핍한 자기들을 도와 달라 말할 줄도 모른다. 그저 도울 수 있어 일생 감사했고 그 시절이 영광스러웠다고 눈물만 뚝뚝 흘릴 뿐. 대한민국 호국영령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만 있지 않다. 에디오피아 참전 용사들이야말로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유공자다. 내가 낸 세금이 그분들 계시는 빈민촌으로 갔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인격자들이 모여 사는 그곳으로!
하지만 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번영을 누리는 우리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자기편이 조금만 손해를 보면 견디지 못하고 서로 헐뜯는 자아의 이전투구가 곳곳에서 도무지 끝날 줄 모른다. 본래 자아는 인간보다 작은 차원에 속하지만 인격은 인간보다 큰 차원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자아로만 꽉 차 있으면 제대로 사람 구실 하기가 어렵다. 남 도울 줄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교육 환경에서는 자아만 보존하지 인격을 가꾸기는 요원하다.
인격은 타자를 위한 섬김 안에서만 빚어지고 발휘되는 인간의 속성이자 능력인 까닭이다. 신학자 블라디미르 로스키는 인격이란 본성을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 한 적절한 장소를 인정할’ 때에만 포착된다고 말한다. 그곳이 어디일까. 타인의 번성을 염원하는 자리일 것이다. 아디스아바바 한국촌에서 여생을 함께 지내는 노병들에게 그 자리는 오롯이 간직돼 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추앙을 받고도 남을 고귀한 인격의 자리 말이다.
시인 정현종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인간과 인격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한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공기는 생기, 호흡, 숨결이다. 공기가 있다는 건 공간이 있다는 뜻. 73년 전 자기 집 안방 구들목까지 다 내주었던 에디오피아의 인격은 그 시절 한국이 한껏 기대어도 좋았던 맑디맑은 존재였다. 세계에서도 유독 커피 사랑이 남다른 한국인. 이젠 적어도 6월 25일 단 하루만이라도 다툼을 멈추고 서로 예가체프 원두를 갈아주며 인격과 국격의 깊이를 음미해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에디오피아)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행 8:39)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