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당근 한 상자가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생채를 만들거나, 따뜻한 당근 수프를 만들 수도 있다. 소금과 꿀, 레몬즙과 약간의 홀그레인 머스터드가 있다면 상큼한 당근 라페를 만들 수 있겠지. 이웃에게 나눠주는 건 어떨까. 요리하고 남은 당근 밑동은 물에 담가보자. 고양이 앞니보다도 작은 싹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높이 자라기를 멈추고, 연초록에서 진녹색으로 잎사귀의 채도를 높일 것이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 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안희연 시인의 시 ‘당근밭 걷기’ 일부다. 이 시 속에는 ‘나’와 ‘당근’과 ‘두더지’가 등장한다. 알다시피 땅속의 능숙한 채굴자인 두더지는 시력이 거의 퇴화했다. 그래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두더지의 시선에 의미를 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제자리에 그대로 둔다. 당근은 당근대로, 두더지는 두더지대로, ‘나’는 ‘나’대로 두어, 그다음에 시작되는 이야기를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인생은 한 평의 밭을 가꾸는 일. 어느 날 당신은 당근을 뽑으며, 가슴 뿌듯한 자연의 신비를 느낄 것이다. 또 어떤 날은 두더지가 파놓은 구덩이에 발이 빠지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땅속에 사는 두더지를 땅 위에서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 모든 상황을 무해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밭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여, 당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비옥한 땅에 입을 맞추며 기도를 드리는가. 아니면 실패한 심정으로 밭에 불을 지피는가. 시인은 조용히 묻는 듯하다. 오늘 당신은 마음밭에 무엇을 심겠느냐고.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