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은 변두리 촌사람들에게 세계 비전을 던졌을까

입력 2024-06-27 03:08
BSH 이스라엘 대회에 참석한 메시아닉 유대인과 한국 통일 코리아 이스라엘 선교팀이 지난 22일 이스라엘 아스돗 베스할렐교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황성주 회장 제공

예루살렘은 세계 역사의 시작점이자 끝이면서 지리적으로 땅끝이다. 그런데 세계의 중심 예루살렘은 지금 전시체제이고 불확실성의 안개가 드리워져 있다. 도심과 골목마다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빌리온 소울 하비스트(BSH) 이스라엘 대회에 참석하는 통일 코리아 팀이 최근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했을 때 관광버스는 한 대도 없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끝난 지난해 수십 대가 북적이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모든 전시 상황이 그렇듯 이스라엘은 매우 위축된 상황이다. 반면 국제꿈의학교 학생들과 탈북 청년들로 이루어진 BSH 이스라엘 선교팀은 상황을 초월한 기쁨의 찬양과 담대한 기도로 나아가며 주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다. 세계복음화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통일 선교를 목표로 하며 최후의 선교 도전인 이스라엘 선교를 강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지상 교회 중 실제 출석 성도 수가 가장 많은 교회는 인도 하이드라바드의 갈보리 템플이다. 50대 초반의 사티시 쿠마르 목사는 이 교회 설립자로 인도의 대부흥과 대추수를 주도할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엄청난 영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가 아닌 오직 회개를 강조하는 말씀 위주의 교회가 이토록 부흥하는 현상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는 강단 뒤의 단칸방 집에서 살고 있는데 한번은 그 집에서 식사 교제하던 중 이런 말을 들려줬다. “초대형 교회 목사들을 가끔 만나는데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비전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목회적 꿈을 이루면 현실에 안주한다. 도전적 삶과 뜨거운 영성이 사그라진다. 끝없이 추구해야 하는 위대한 비전과 담대한 목표가 없다 보니 절박하게 주님을 붙잡을 일이 없어지고 무사안일 속에서 쉽게 타락의 길을 간다.” 정말 핵심을 찌르는 충격적인 진단이었다.

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28절에서처럼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려고 그토록 열망했는가. 그것은 스페인이 당시의 땅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생애에 지상명령을 완수하고 싶어 했다. 조지 뮬러는 평생 10만명의 고아를 섬기다 70세가 되던 해 순회 복음 전도자가 되어 20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무려 300만명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국제예수전도단(YWAM) 설립자 로렌 커닝햄은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 선교에 헌신하며 200개국을 다니다가 88세에 천국으로 떠났다.

이들이 말년까지 거룩과 성결을 유지하며 위대한 사역을 완성했던 유일한 이유는 끝없는 도전 정신에 있었다. 자신을 쉴새 없이 몰아붙이며 완수해야 할 절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태도가 부패와 타락을 막았다. 그 열정이 자아도취와 자아숭배로부터 구원했다.

이제는 편리의 타락과 여유의 영성에 대해 눈떠야 한다.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모든 미디어와 SNS를 총동원해 편리와 여유의 틈새로 지옥의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특히 돈 섹스 권력이 병든 상상력을 동원해 죄악을 미화하며 쾌락과 탐욕을 정당화하고 있다. 세계관의 전쟁이요 상상력의 싸움이다. 병든 상상력에 사로잡히면 바른 꿈과 목표가 없어지고 열정이 죽는다. 삶의 가장 큰 상실은 질병이나 파산이나 죽음이 아니다. 비전의 부재요 열정의 죽음이다. 우리의 불행은 ‘꿈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꿈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아예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문제다. 모두가 비전이 없어 죽어가고 있다.

상상력의 부재이다. 성경적 상상력을 키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입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경이로움을 체험해야 한다. 꿈은 경이의 감정에서 탄생한다. 그러려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누려야 한다. 따뜻한 항구를 떠나지 않고는 신대륙을 발견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에선 꿈이 생기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에 접할 때 꿈이 생기고 비전이 탄생한다.

최근 한국 교계와 선교계의 리더십에 있는 사역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성경적 영성의 본질을 흐리며 사회 이슈화되고 있다. 모두가 편리의 타락성과 여유의 영성을 관리하지 못한 탓이다. 지도자가 안전지대에 머물면 자아도취가 시작된다. 비전은 왜소해지고 열정은 자취를 감춘다. 종교인은 이단이 되고 경제인은 탐욕의 노예가 되고 정치인은 독재자가 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분야의 톱리더들이 이 말씀을 붙잡길 바란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 : 13~ 14 )

비전 상실은 대개 첫사랑의 상실과 같이 온다. 영성의 본질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상실하면 그 자리를 슬그머니 음녀가 차지하게 된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는 것을 성경은 영적 간음이라 한다. 필자가 BSH를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며 영혼 구원에 전력하는 것은 소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요즈음 사도 바울이 말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왜 예수님은 변두리 촌사람들에게 세계 비전을 던지고 땅끝까지 보내셨을까. 깊이 묵상하기 바란다.

황성주 이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