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흰색 실선 넘어 차선 바꾸다 사고, 12대 중과실 아냐”

입력 2024-06-21 04:04
국민일보DB

운전 중 흰색 실선을 넘어 진로 변경을 하다 낸 사고는 12대 중과실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대법원 새 판례가 나왔다. 이에 따라 앞으로 흰색 실선 침범 교통사고를 내도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종합보험이 있으면 형사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운전자들의 현실적 사정을 반영하고, 형사처벌 범위가 부당하게 확대되지 않도록 제동을 건 판결이라는 평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20일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상 치상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공소를 기각(기소 무효)한 원심 판결을 대법관 전원일치로 확정했다. A씨는 2021년 7월 대구의 한 도로 1차로에서 운전하다 흰색 실선 구간에서 2차로로 변경했다. 2차로 뒤편에서 달리던 택시가 급정거했고, 택시 승객 B씨가 전치 2주의 목 부상을 입었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다친 경우 교특법은 운전자가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종합보험에 가입한 경우(중상해 제외) 처벌하지 않는다. 다만 ‘12대 중과실’은 예외다. 12대 중과실엔 음주운전, 횡단보도 침범 사고를 비롯해 ‘통행금지 안전표시 지시 위반’도 포함됐다. 검찰은 흰색 실선은 ‘통행금지 표시’에 해당하며, A씨가 이를 어겨 형사 처벌돼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2004년 흰색 실선은 안전표시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지만 실제 기소된 형사 사건은 거의 없었다. 경찰은 2018년 검찰과 협의를 거쳐 흰색 실선 침범 사고를 12대 중과실로 단속했다. 유죄가 나온 1심 판결은 2017년 2건, 2018년 3건, 2019년 19건으로 최근 들어 급격히 늘었다. 흰색 실선 사고를 무조건 형사처벌하는 건 과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다는 점을 노려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사례도 나왔다.

원심은 이를 고려해 ‘흰색 실선은 통행금지 표시로 볼 수 없다’며 A씨 사건을 공소기각 판결했다. 중앙선 침범처럼 방향이 달라 명백히 통행금지되는 사안과 동일한 방향 운행 중 차로 변경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흰색 실선을 어느 정도 지나지 않고 진로 변경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데도 교특법으로 모두 처벌하겠다는 건 편의주의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결이 옳다고 봤다. 대법원은 교량·터널 내 흰색 실선 앞지르기 사고의 경우 보험 가입 여부 등과 관계 없이 처벌토록 별도 규정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판결로 중대 교통사고 발생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흰색 실선 침범 자체가 허용되는 건 아니며 여전히 범칙금 부과 등으로 규율될 수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도로에 흰색 실선이 많은데, 무조건 기소한다는 건 악법이었다. 현실을 반영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