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92) 새에덴교회 장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의용대 1기로 선발돼 전선에 배치됐다.
1932년 중국 톈진에서 태어난 장 장로는 중국어 특기자로 미군 8240부대에 배치돼 중국군 동향을 살피는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과 교전을 했고 전투 중 적이 던진 수류탄에 부상을 입고 전역한 뒤 1951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이후 도미해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단국대 사학과 교수와 총장, 이사장을 지내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0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역임했다.
참전용사들이 일군 자유와 평화
23일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나라사랑 보훈음악회에서 격려사를 전한 장 장로는 “학도의용대 1기로 6·25전쟁에서 총을 메고 싸웠다”면서 “정부도 하기 힘든 보훈행사를 18년간 이어온 새에덴교회에 감사하며 오늘 음악회에 참석하신 모든 참전용사분들께 깊은 감동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이 넘도록 이어진 6·25전쟁에는 통계마다 다르지만 100만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74년 전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100만여개의 아픈 사연이 생겨난 셈이다. 장 장로처럼 전장에서 살아남아 대한민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사례도 적지 않지만 전쟁 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이들도 부지기수다.
국방부에 따르면 6·25 전쟁 기간 국군 사망자는 13만7899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육군이 13만5858명이었으며 해군과 공군은 각각 1903명과 138명이었다. 또한 국군 부상자는 45만742명, 포로는 8343명이었다.
유엔군 사망자도 3만7902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미군 사망자는 3만3686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영국군(1078명)과 튀르키예군(966명), 캐나다군(516명)이 뒤를 이었다. 유엔군 실종자와 포로도 각각 3950명과 5817명에 달했다. 부상자는 무려 10만3460명이었다.
‘잊힌 전쟁’ 보은으로 일깨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시작되면서 발발한 6·25전쟁은 이토록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잊힌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혔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던 전쟁, 그리고 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참전용사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져 왔다. 18년 동안 한해도 쉬지 않고 참전용사를 위한 보은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도 그 중 하나다. 민간차원에서 눈에 띄는 헌신을 해 온 새에덴교회의 노력이 값진 이유다.
하지만 보은을 위한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으로 생존해 있는 6·25전쟁 참전 유공자는 3만 8548명으로 4만 명도 채 남지 않았다. 90대 중반이 대부분인 참전 유공자들이 매년 1만명가량 사망하면서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6사단 7연대 소속으로 9·28 서울수복 이후 국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했던 부대의 일원이던 강태환(92)옹도 학도병 1기로 참전했었다.
헌신 기억해주는 교회에 감사
대구상업중학교 6학년(현재 고3) 때 입대한 강옹은 “고교 야구선수로 활동하며 청룡기에서 우승의 기쁨도 맛볼 정도로 활약하다 참전했다”면서 “가장 빨리 압록강에 도착한 부대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평양까지 후퇴한 뒤 부대를 재편성해 다시 전선에 배치됐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기억의 소중함에 대해 말하면서 참전용사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억해 주는 교회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강태환옹은 “원래 불교 신자였지만 최근 기독교로 개종했다”면서 “새에덴교회처럼 참전용사를 기억해 주는 곳이 없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본다. 소강석 목사와 새에덴교회 교인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고 전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