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8) 군 복무 후 연희대서 공부… 졸업과 동시에 강사로 임명

입력 2024-06-12 03:07
민경배(오른쪽 첫 번째) 박사가 1956년 연희대학교 신과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고 있다. 민 박사 제공

해군에서는 1953년 3월 22일, 2년 2개월을 복무하다가 명예 제대했다. 나는 6·25 참전 국가유공자다. 곧 연희대학교 부산분교에서 공부하다가 1953년 여름 서울 환도로 서울 용산구 남영동으로 이사, 56년 3월 연희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곧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데 전쟁 이후라 교수님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해 9월, 나중에 미국 보스턴대학교 명예교수가 된 감신대 출신의 정재식과 함께 교양 ‘종교’ 강의 강사로 임명된다. 내 나이 만 22살 때 일이다. 그때 학생으로는 봉두완 김인회 남기심 김수철 최정훈 민성기 등이 있었다.

1958년 3월 대학원을 졸업했다. 당시 석사 논문은 기름종이에 등사기를 사용해 철필로 일일이 글자 하나하나를 긁었다. 그런 다음 기름종이를 두루마리로 펴서 찍어 복사하고 그것들을 묶어 논문집을 만드는 형편이었다. 그러고는 곧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연세대 부산분교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그때 이용도계의 한준명 목사가 함께 교수를 했다. 그는 고전어 천재였다. 그리고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한영환 박사, 한양대 법학과 교수로 이름난 김기수 박사가 함께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서 1년 반을 지냈다.

그때 부산에서 연희분교 학장 오기형 교수가 한국에서 처음 세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학당을 설립했다. 그리고 경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호주 선교사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거기서 아내 임호빈이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한국어학당이 서울에 올라가 박창해 교수의 주도로 아내와 함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수가 된다. 외국인을 위한 대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해방 이후 최초였다. 아내는 거기서 정년까지 가르치며 1988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문법’을 저술 간행했다. 그것이 추후 일본어 한문 영어 독일어로 번역 간행됐다. 이때 비로소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의 한 정석이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58년 8월 나는 영국 스코틀랜드 애버딘대학교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집에는 어린 아들 유홍(당시 네 살)과 딸 성의(당시 한 살), 아내가 서울에 남았다. 애버딘대학교는 중세에 세워진 학교로 그 중세대학 건물인 킹스칼리지는 그대로 보존돼 아직도 찬연한 중세대학의 위풍과 풍취가 빛나고 있다. 그 대학교의 문장과 교훈은 ‘nitium sapientia timor Domini’ 곧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었다.

당시 신학부에는 신약학자로 유명한 헌터 박사와 교회사학자 제임스 맥큐엔 박사가 있었다. 같은 반에 데이비드 리드와 스티븐 포티치 그리고 스위스의 학생 하나가 있었다. 나는 1961년 겨울 눈길에 자동차를 빌려서 스코틀랜드 북쪽 친구 집을 찾아가는 길에 트럭을 추월하다가 미끄러져 3~4m 정도의 길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앞의 창문이 깨지면서 오른쪽 눈을 찔렀다. 정말 하나님 은혜로 순식간에 눈을 무의식중에 감았고 깨진 창 조각이 눈꺼풀을 4㎝가량 찢었다. 그 무서운 사고에 그 상처가 전부였다. 몸은 안전했다. 그런 사고에도 안구는 안전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말씀이 있다. 바로 이런 기적을 두고 하는 말씀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얼마나 울며 기도하고 감사했는지 알 수 없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