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현재의 베스트셀러가 어떤 책들일지 맞힐 수 있다. 아마도 ‘돈’ 버는 법, 그리고 ‘자기 계발’이나 ‘마음 건강’ 같은 주제들일 것이다. 이는 방구석 관심법이 아닌, 근래 몇 년 간의 통계 덕분이다. 그렇다는 건 우리네 관심이 거기 있다는 뜻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런 현상이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아 나선 현대인들의 페르소나로 해석된다.
절대 권위의 상징인 왕을 시민의 손으로 직접 처단했던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정치혁명 그 이상의 함의다. 그 이후로 인류는 눈에 보이는 권위만 타파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권위, 즉 그동안 당연하기만 했던 모든 권위를 하나씩 부정하고 재해석 해갔다.
그러나 ‘자연이 진공상태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권력에는 공백이 없다’라는 어떤 작가의 말처럼, 왕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공백에 자기 자신을 세워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현대인들의 자아상이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왕인 나 개인이 의미를 부여할 때만 비로소 당연하다. 이러한 경향성은 점점 더 거세졌고, 그래서인지 근래 젊은 세대는 심지어 ‘성’과 같이 타고난 것들마저 개인의 권위로 규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자기를 왕으로 삼은 가운데, 반대급부로 등장한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수동성’에 대한 극단적 히스테리다. 재밌다. 살다 보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동적 현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간이 신은 아니기에.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조금의 수동성에도 비명을 지른다. 그래서 사는 게 더 괴롭다. 왕적 자의식을 가진 이들의 자존감이 어느 때보다 무너져버린 현실이 참 역설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돈’과 ‘자기 계발’과 ‘마음 건강’이 눈에 들어온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왕관과 금홀(금으로 된 왕의 지팡이)이 ‘돈’으로 치환됐다. 또한 왕은 완벽해야 하기에 자기 계발에 몰두한다. 그러나 스스로 대관식을 치를 수 있는 이들은 소수다. 하나둘 탈락하는 것을 넘어, 왕 같은 이상과 비루한 현실의 간극이 너무도 크기에 쉽게 절망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혐오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면의 비움이나 관리를 통한 마음 건강 챙김이 주목받는다. 그러나 이는 모두 왕적 자존감을 위한 대안들이고, 결국 이 모든 대안은 자기 ‘노력’으로 이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그게 가능할까. 그런데도 개인 노력 문제로만 따진다면 너무 잔인하다.
‘자존감’이라는 말의 뜻에 이미 답이 있다. 자존감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라고 정의된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사랑받을 만한 가치를 위해 노력할 게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사랑을 받으면 된다. 그리고 이는 성경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또 다른 하나님의 형상. 즉 타인과의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증언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함으로, 사랑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상실해 버렸다. 게다가 무엇 하나 당연한 것 없는 현대인들은 사랑의 또 다른 가능성인 가족이나 연인과의 관계마저도, 자신의 왕적 자의식을 위해 제물로 바치고 있기에, 사랑받음의 근거는 모두 상실되어 간다. 남은 것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한 노력뿐. 암담하다.
그래서 복음이 답이다. 당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찾아오신 진정한 왕, 결국 예수를 통해서 주어지는 메마르지 않는 신비적 사랑만이 무너져가는 자존감에 대한 답이다. 또한 그래서 교회가 답이다. 모두 스스로 왕이 되려는데, 도리어 섬기는 종으로서 사랑하려는 이들의 공동체는 분명히 답이 된다. 그런데 만약 복음을 말하는 교회에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왕 되려는 이들로 가득하다면, 만약 사랑을 말하는 교회에 섬기는 종이 아닌 자기가 왕 되려는 이들만 가득하다면 어찌 될까. 함께 가라앉는 똑같은 난파선이 아닌 구원의 방주가 되길 소망한다.
손성찬 목사 이음숲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