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가민가하던 대통령 비자금의 실체를 처음 까발린 게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다. ‘4000억원대 차명계좌설’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10월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그 물증으로 시중은행 예금조회표를 제시하자 대국민 사과문을 통해 비자금 실체를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정치 관행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기업들로부터 모은 통치자금이라며 대부분 정당운영비 등 정치 활동에 썼다고 했다. 일부는 그늘진 곳을 보살피거나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격려하는 데도 보탰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말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 충북 음성 ‘꽃동네’의 후원인이었던 인연으로 오웅진 신부가 연희동 자택을 위로 방문한 적이 있다. 오 신부는 골목길에서 맞닥뜨린 국민일보 기자가 “대국민 사과문에서 그늘진 곳을 위해 썼다는데 꽃동네 후원금으로 얼마를 냈나”고 묻자 “매달 1000원을 냈다”고 답해 인색한 씀씀이가 회자되기도 했다.
그 비자금 의혹이 다시 소환됐다. 지난 30일 노 전 대통령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이혼 항소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으로부터 재산의 35%(1조3808억원)를 받아내는 세기의 판결에 부친 비자금이 결정적 역할을 해서다. 노 관장은 1990년대 시아버지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전달된 300억원이 증권사 인수, SK㈜의 뿌리인 대한텔레콤 주식 매입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모친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 온 선경건설 명의의 50억원 어음 사진 6장과 ‘선경 300억’ 메모가 제출돼 금전적 지원에 대한 증빙으로 받아들여졌다. SK가 사돈 덕에 성장했음을 인정한 셈이지만 노 관장 입장에서 부친의 공을 딸이 물려받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더구나 재판부가 300억원이 앞서 1997년 대법원에서 포괄적 뇌물죄로 인정된 4600억원의 비자금과는 별개로 불법으로 볼 수 없다고 한 부분도 논란거리다. 다만 확실한 건 29년 전 노 전 대통령 해명과 달리 통치자금이 사적으로 사용돼 딸의 막대한 재산 형성을 돕게 됐다는 점이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