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1934년 6월 22일은 세계가 대공황으로 그 생활이 가장 혹독했던 15년 전쟁기(1931∼1945)였다. 태어난 곳은 황해도 봉산군의 은파(銀波) 가당촌이라는 마을이다. 주시경(周時經)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 나의 부모님은 할아버지 집에서 같이 사셨다. 할아버지는 서울 지주의 현지 감관(監官)이셨다. 그 지주는 재령의 광활한 평야 남어리벌의 논을 소유한 부자였다. 가당촌은 재령 남어리벌 한복판에 노량진 정도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여흥(驪興)민씨 가문인 아버지 민상기(1910~2003)는 배재중학교 3학년 때 재령의 명문 명신중학교로 옮기고 그 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 기창길(1910~1995)은 평양 숭의여자전문학교 출신이다. 여자전문학교에 다닌 당대의 대단한 여성이 어떻게 아버지를 만나 시골 농가로 시집을 온 것인지 모르겠다.
어머니 말씀에 시골 시집살이는 고생길이었다. 할아버지 집에 일꾼이 열명가량 있었는데, 그들을 위한 식사를 다 어머니가 마련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짓고 곁들이 점심 그리고 저녁상까지 다 차렸다. 온종일 일만 한 셈이다. 내가 거기서 태어나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심될 정도다.
아버지는 그 시골에서 나와야겠다고 불끈 주먹을 쥐셨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몹시 어려운 국가 약종상 시험을 준비하고 마침내 합격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에게 어렵게 출가를 허락 받았다. 이후 재령의 북율에 진출해 약방을 개업했다. 내가 3살 때 일이다. 그 광활한 논의 소유주는 아주 친절한 일본 할아버지였다. 나는 그 집에 자주 놀러 가서 한국인들은 먹을 수가 없었던 귤을 얻어먹곤 했다. 정말 꿀맛 같았다.
그러다가 한 2년쯤 지나 장연읍으로 이사갔고 아버지는 거기서 약방을 개업했다. 나는 다섯살 무렵 가당촌 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뒤뜰 과수원에 있는 배나무에서 설익은 제비 알 크기 배를 따 먹고 병에 걸렸다. 시골에는 약방도 없었기에 오래 앓았다. 위험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어머니는 죽어도 집에서 죽자며 나를 데리고 장연으로 갔다. 그리고 좋은 약을 써서 살아났다.
장연에서도 세번 이사하면서 약방을 발전시켰다. 세 번째 옮긴 읍내리. 그 바로 뒤에 해서병원이 있었다. 그 원장 서재면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인이며 만주 심양에서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파송 선교사 존 로스(J. Ross)와 함께 성서를 번역하고 일본에서 인쇄해 전국에 다니면서 판매한 서상륜의 직손이었다. 그의 아들딸과는 앞뒷집에 살며 친하게 지냈다. 당시에는 그런 대단한 한국교회의 정통 원조의 집안인 것을 모르고 지냈다.
그들도 6·25 때 남한으로 피란해 1950년대 후반 서울 수유리 어느 버스 안에서 그 딸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약력=1934년 출생. 중앙고등학교, 연희대학교 신과대학, 연세대학교 대학원, 영국에버딘대학교 신학원, 런던대학교 대학원 졸업. 연세대학교 교수 및 연합신학대학원장, 서울장신대 총장,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현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석좌교수.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