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쟁점 법안들이 정당한 지원과 보상보다는 ‘무리한 특혜’로 흐를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5개 중 4개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야 합의 없이 통과된 점, 국가 재정을 자칫하면 ‘선심쓰기’ 식으로 활용하게 되는 점 등도 막판 제동의 이유가 됐다. 대통령실은 국회 임기 만료 하루 전 야권의 의석수 힘으로 쟁점 법안들이 무더기로 넘겨진 데에는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정략적 의도가 있다고 본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무리한 입법에 대한 재의요구는 거듭해서 하더라도 국민들이 이해하실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다른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돈으로 표를 사는 방식은 당장 환영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국가 재정은 그렇게 운영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전세사기특별법이 피해자를 돕겠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서민의 피해를 야기하는 허점이 있다고 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주택도시기금은 무주택 서민의 내집 마련 꿈을 실현하고자 납입한 청약저축 등으로 구성된다”며 “이러한 돈을 일부 피해자에게 선지급하는 법안을 강행 처리하는 것은 과연 온당하냐”고 반문했다. 최소한 주택 청약자들의 입장까지 확인해 보는 과정이 없었다는 지적이다.
민주유공자법의 경우 실제 유공자를 가려낼 만한 명확한 심사 기준이 없다는 점이 거부권 행사 건의 이유로 제시됐고, 윤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였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민주유공자법은 자유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훼손하고 국가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며 사회통합을 저해한다”고 말했다. ‘부산 동의대 사건’이나 ‘서울대 프락치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관련자 등도 유공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대통령실은 강행 처리된 법안 5개 모두를 거부해야 할 것인지, 일부는 선별적으로 수용할 것인지를 고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와 법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실제 정치적 부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방침을 세웠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전날만 해도 모든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건의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날 세월호피해지원특별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의료비 지원 기한을 연장하는 법안이므로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한·아랍에미리트(UAE) 정상회담 직전 여당 측 건의를 보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추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사례가 늘어나는 것과 관련해 “늘어나는 숫자는 곧 거대 야당의 입법 폭주의 가늠자”라며 “거대 야당의 일방 독주가 없다면 재의요구권 행사도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입법 폭주가 심각해질수록 대통령의 헌법적 거부권이 필요한 이유가 커진다”고 말했다.
이경원 이종선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