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69)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어디서든 '대표'가 되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내외 모임을 이끌었다. 대학에서는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자연스럽게 정치를 꿈꾸고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랐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선교사는 "예수님을 만난 뒤 무엇이든 세우는 권능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몸으로 배운 인생이었다"고 고백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0년 가까이 사역하는 중 코아월드미션 세계선교대회(4월 23~26일) 공동운영위원장 역할을 맡아 잠시 귀국한 이 선교사를 최근 만나 회심 전과 후의 변화된 삶을 들을 수 있었다.
회심 전 이희재 1
이 선교사는 반공포로 출신인 아버지와 서울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교장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아버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술도 좋아하셨다. 그 때문인지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뒤 평생 왼쪽이 불편한 상태였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으로 이 선교사는 기억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도맡았던 어머니는 성격이 호랑이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이 선교사의 외삼촌은 당시 알아주던 ‘주먹’으로 어머니의 식당에서 행패 부리던 건달들도 외삼촌 이름만 듣고도 도망가기 일쑤였다.
이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착실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명문 경기중학교에 떨어지고 경동중학교에 입학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노렸지만 다시 떨어졌다. 경동고등학교를 다니던 이 선교사는 인근 수도여고와 정신여고 학생들과 함께 ‘예찬 문학 써클’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영락교회 고등부와 영어성경반에 한 번 갔었는데 이방인 같아 계속 나가지 않았다”면서 “그때 계속 다녔다면 아마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회심 전 이희재 2
1974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이 선교사는 반 대표로 선임된 뒤 전체 대의원회에서 3차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의장으로 뽑혔다. 그는 “의장 선거에 아무도 나를 추천해주지 않아 옆에 앉아 있던 친구에게 반강제로 후보로 추천하도록 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헌법 반대 투쟁이 휩쓸던 시기였다. 이 선교사는 “1학년 때 비상학생총회를 주동한 혐의로 유치장 경험을 한 뒤 2학년 때는 사법시험을 볼 생각으로 몸조심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75년 4월 무기정학에 이어 한 달 후에는 제적 처리가 됐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쫓겨난 이 선교사는 강제로 입대한다. 강원도 원통에서 가까운 미시령 유격장으로 배치됐다. 이 선교사는 “도저히 내 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군 생활이었지만 어느덧 생각지 않던 의지가 발동해 유격대 조교로 독수리처럼 자라갔다”고 회상했다.
제대 후 고시원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태가 터졌고 꿈에 그리던 복학 결정이 나왔다. ‘주의 은혜’로 이듬해 3월 법대로 복학했다. 어렵게 복학했으니 이제 다시는 시위에 나서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던 그해 5월 14일 서울 영등포역 앞 대규모 시위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광화문으로 향하던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으로 여의도에서 막혀 있었다. 그때 이 선교사는 생각했다. ‘내 길은 이게 아니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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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이 선교사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복학 전 친구의 전도로 영락교회에 등록했던 이 선교사는 등록한 지 몇 달 후 10·26 사태가 터졌고 한 달 뒤 아버지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다. 이 선교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 그날 하룻밤 자러 온 사촌 여동생에게 아랫목을 내주고 아버지는 윗목에서 주무셨다. 하필 아버지가 잔 곳에서 가스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랑 사촌은 가스에 중독은 됐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이 선교사는 “아버지는 제게 큰 산과 같은 존재였다. 제가 아무리 큰 인물이 되더라도 그걸 기뻐할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허무했다”면서 “‘아버지가 안 돌아가실 수는 없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6개월가량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라는 말씀이 이 선교사의 가슴을 쳤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소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선교사는 “그렇다고 이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며 “여전히 삶의 주인은 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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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역 시위 후 두 달여 뒤 영락교회로 전도했던 그 친구가 참가비를 대신 내주며 강권하자 이 전도사는 예수전도단의 5박 6일 일정의 전도요원훈련에 참여한다. 말씀 강의와 집회가 이어졌다. 마지막 날 밤 인도자는 한국 예수전도단을 세운 임종표 선교사였다. 이 선교사는 그저 관망했다. 인도자의 모습은 선동가처럼 보였고, 선동이라면 자신이 더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의 상황인데 무슨 찬양이냐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들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더 정직하고 순수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성령의 책망으로 회개가 터져 나왔고 인도자가 앞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뜨거운 불이 내렸다.
회심 후 이 선교사는 영락교회에서 주일 대예배와 청년예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는 주일 새벽과 금요철야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영락교회에서는 중등부 교사와 청년부 활동을 하며 임명선 권사와 청년들과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새하늘선교회가 태동했다.
회심 전과 후의 변화
회심 전 이 선교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려고 애쓰고 전력투구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주를 만난 후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진로를 인도하셔야 따라갔다. 어떤 새로운 길을 갈 때는 늘 주께서 강권해 주시는 그 섭리를 신뢰했다. 모든 결정에서 중요한 원칙은 하나님이 직접 강권하느냐 여부였다. 이 선교사는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보장이 없지만 하나님이 시작한 것은 주님이 시작했기에 앞길이 캄캄할 때도 그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 선교사는 건설사인 럭키개발(현 GS건설)에 들어갔다. 신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며 40개월 근무했을 무렵, 영락교회에서 무척 아끼던 후배가 “형님 함께 신학 합시다”면서 장신대 신대원 원서를 들고 왔다. 그 후배는 2년 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 선교사는 하나님의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에 사표를 낸 뒤 주의 종의 길로 들어섰다.
이 선교사는 서울 동광교회와 동일교회, 고척교회 등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목양의 꿈을 키워갔다. 그때 신대원 원서를 들고 왔던 후배가 다시 싱가포르 ACTI(아시아 타문화권 선교훈련원) 원서를 들고 왔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선교를 지향하는 목양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선교사 훈련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지원했다. 달력을 하나하나 뜯으며 견뎌야 하는 고된 7개월의 훈련을 마쳤다. 이후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몸으로 배우다
이 선교사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목회를 하기 위해 3~4년 정도 경험을 쌓겠다는 생각으로 선교사의 길로 들어섰다”면서 “처음엔 중국을 염두에 뒀지만 러시아로 하나님이 강권하실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 선교사는 1994년 11월 선교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기 위한 파송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경험을 쌓자며 갔던 길이었는데 올해로 30년째 사역하고 있다.
이 선교사는 그동안 디베랴교회를 개척하고 성령께서 일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 여러 선교사와 초교파적으로 미르선교회를 창립했다. 이후 미르신학교와 미르한인교회, 미르고려교회 등을 세워 러시아 복음화를 위해 동역하고 있다. 그는 “선교 사역을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기도와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품으며 위기 때마다 그 사실을 마음에 새기려 했다”면서 “결국 내가 만난 예수 또 우리가 만난 예수, 사도신경의 보편적인 예수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하나님을 만난 후의 삶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몸으로 배운 인생’으로 표현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보시는 주께서는 우리 마음에 동기를 살피고, 우리의 앉고 서며 일어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말소리까지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까지도 아신다”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알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가 있다”고 말했다.
내년 12월 은퇴를 앞둔 이 선교사는 “은퇴 이후 민족 화해와 세계선교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말씀, 성령, 영성 사역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감당하게 하실지는 모른다. 이 선교사의 기도는 한결같다. “주여, 오늘도 우리에게 주의 빛을 비추시고 주를 즐거워하며 새로운 날을 보내게 하소서.”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