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중 정상회의가 27일 개최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리창 중국 총리가 서울을 찾았다. 이번 정상회의 개최는 4년5개월 만이다. 긴장과 분쟁이 두드러지는 최근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반가운 일이다. 우리 입장에서 일본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개선됐지만 한·중 관계는 경색 국면이 지속 중이다.
한·일·중 정상회의는 2008년에 시작됐다. 이후 세 나라를 돌아가면서 개최됐다. 매년 개최가 원칙으로 2012년까지 지켜졌다. 그러나 이후 한·일 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갈등, 사드 배치에 따른 한·중 관계 악화,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등으로 인해 개최가 종종 지연돼 간헐적으로만 이뤄졌다. 중국의 부상에 따른 일본의 경계심이 높아지고 양국 간 경쟁도 점차 강해졌다. 정상회의는 한·일·중 협력을 제도화함으로써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꾀한다는 발상에서 출발했으나 거꾸로 양자 관계 악화로 협력의 관성이 약해지는 추세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모처럼 열린 이번 한·일·중 정상회의 개최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국가안보실은 “이번 정상회의는 3개 나라가 3국 협력체제를 완전히 복원하고 정상화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회의를 통해 지역 평화를 위한 획기적 성과를 도출하기보다 관계 악화를 방지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실질 협력을 증진한다는 관리 차원에서의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다.
관리 외교의 부각은 최근 국제정세의 두드러진 양상이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진영화와 경쟁이 심화하고 있지만 정면 충돌은 피해야 한다는 인식도 강하다. 이는 탈냉전기에 비약적으로 이뤄진 경제적 세계화의 결과로 경제적 상호 의존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핵전쟁 등 전면적 무력 충돌이 초래할 파국에 대한 분명한 전망 때문이기도 하다. 치열히 경쟁하면서도 싸우진 않는 전쟁과 평화 사이 ‘차가운 평화’ 시대가 펼쳐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국제관계의 관리가 강조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전략적 경쟁을 심화하면서도 지난해 11월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앞으로 양국 관계를 관리해 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중국은 주변국을 위협하고 강박하는 공세적 ‘전랑(戰狼) 외교’를 접고 외교적 관여를 적극화하기 시작했다. 시진핑 주석이 이달 중순 5년 만의 유럽 순방에 나서서 유럽에서의 중국에 대한 경계심 확대를 막으려 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중국 방문 직후 북한을 찾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국이 러시아 및 북한과 연대한다는 서방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한편 미국은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을 뜻하는 디커플링(decoupling) 대신 유럽이 만들어낸 신조어인 위험 축소, 즉 디리스킹(derisking)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또 지난주 월요일 대만의 라이칭더 신임 총통이 취임사에서 자신의 오랜 대만 독립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만해협의 현상 유지를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대만 신정부의 현상 변경 시도를 경계하는 미국의 관심이 반영돼 있다.
한·일·중 정상회의도 이런 맥락에서 개최됐다. 물론 관리 외교의 부상이 미·중 경쟁 완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수면 아래 긴장은 계속 표출된다. 하지만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중국 방문 후 언급했듯 ‘난관이 있더라도 이견이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하며 협력의 모멘텀을 이어 나가야’ 한다. 자국의 가치 지향과 장기적 목표를 분명히 하면서도 관리를 통해 위기를 방지하고 협력을 점차 확대하는 게 차가운 평화 시대에 요구되는 외교의 중요한 역할이다.
마상윤(가톨릭대 교수·국제학부)